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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19

박찬호의 현명한 양키스행 결정 박찬호는 역시 현명한 선수인 것 같다. 박찬호는 2010년 2월22일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뉴욕 양키스 행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연봉은 120만 달러 수준이고 30만 달러가 옵션이라고 한다. 그리고 양키스에서 구원투수로 뛸 가능성이 크다. 박찬호는 몸값도 선발자리도 다 포기하고 열정을 택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 그가 2010년 양키스의 핀스트라이프(점선 무늬) 유니폼을 입도록 했다. 그도 고민했을 것이다. 연봉을 좀 더 받고 싶었을 것이고 선발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 시카고 컵스에서 선발 자리를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양키스에서 야구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최고의 구단이다. 2009년 시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돼 다시 최고의 자리로.. 2010. 2. 24.
[추억의 기사] 메이저리그 구단의 한인 스카우트들 밝은터가 2003년 1월27일에 쓴 기사입니다. ‘한국야구의 보석을 찾는 한인들.’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한국 야구에 관심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풀타임 한국인 스카우트를 고용해 ‘흙속의 진주’를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특히 LA 다저스를 비롯, 이미 4개의 메이저리그 구단이 한국 현지에 스카우트를 파견해 ‘보물 찾기’에 한창이라는 뉴스엔 놀라지 않을 수없다. 다저스 아시아담당 홍보관인 정윤현(사진·미국명 Curtis Jung)씨에 따르면 다저스 외에도 미네소타 트윈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애너하임 에인절스 등이 한국인 스카우트를 현지에 파견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저스는 얼마 전 박찬호의 스승인 안병환씨를 한국 스카우팅 수퍼바이저로 임명한 바 있다... 2010. 1. 26.
[스타 열전] 'Fan Favorite' 커비 퍼켓 80년대와 90년대의 야구팬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선수였던 커비 퍼켓. 퍼켓은 남녀노소, 인종 구분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선수였다. 미네소타 트윈스 팬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켓에 대한 호감을 갖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그는 전국구 스타였다. 2001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첫 번째 시도에 전당행을 확정지었을 정도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퍼켓은 2006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45세. 퍼켓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본다. ■ 미네소타의 영웅&미국의 영웅 미네소타 주민들에게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한 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미네소타 트윈스의 스타였던 퍼켓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올 것이다. 퍼켓은 미네소타 트윈스가 1987년과 1991년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는 데 결정.. 2010. 1. 26.
[추억의 기사] 조 토리 감독의 승리 게재일 : 1996년 10월 28일 [38면] 서울 중앙일보 글: 밝은터(ICCsports.com의 블로거) 뉴욕 양키스의 승리는 조 토리 감독의 승리였다. 양키스가 96년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르는 순간 뉴욕 팬들은 양키스의 토리 감독을 향해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전문가들도 「양키스=토리 감독」이라며 18년만에 이뤄진 양키스의 우승을 토리 감독의 작품으로 평가했다.시즌초만 해도 지난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에서 성적부진으로 파면된 그가 문제투성이인 양키스감독 취임 첫해에 우승을 차지하리라고 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양키스는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연봉지급액인 6천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놓은 '슈퍼스타 군단'. 그러나 선수들간의 자존심 싸움과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 2010. 1. 12.
[스타 열전] '빅유닛' 랜디 존슨 Randy Johnson Seattle by iccsports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글/사진: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최주용, 권처용 랜디 존슨은 불 같은 강속구로 많은 팬을 확보했던 투수다. '빅유닛'이란 별명의 존슨은 20대에 많은 승수를 올리지 못했다. 30대에 접어들어 피칭에 눈을 뜬 그는 첫 사이영상을 32세에 받았다. 그는 이후 사이영상 트로피를 4개나 추가했다. 사이영상 5개는 로저 클레멘스(7개)에 이어 2위에 해당된다. 존슨은 2001년에는 월드시리즈 MVP로 선정됐고 2002년에는 내셔널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올스타 선정 10회에 빛나는 존슨은 303승, 평균 자책점 3.29, 탈삼진 4,875개를 기록했다. 존슨은 2004년7월9일 경기에서 102마일의 공.. 2010. 1. 6.
[MLB 30개 구단 역사(5)] 탬파베이 레이스 1998년 창단한  탬파베이 레이스(당시에는 데블레이스였음)는 2008년까지 단 한 번도 5할 시즌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열 시즌 동안 최고 승수는 2004년에 기록한 70승(91패)이었다. 명장으로 불리는 루 피넬라 감독을 영입한 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 팀은 여전히 4할 승률에 머물렀다. 2007 시즌에도 66승(96패)을 챙기는 데 그쳤던 탬파베이의 2008년 상승은 놀라운 일이었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PicApp 조 매든 감독탬파베이는 1900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에 최저 승률을 기록한 후 이듬해에 메모리얼 데이(미국의 현충일)까지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한 첫 번째 팀으로 기록됐다. 탬파베이의 2008년 성적은.. 2010. 1. 6.
[MLB 30개 구단 역사(4)]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구단은 1969년 창단했다. 창단 이후 파드레스는 1984년, 1998년 두 번 내셔널리그 챔피언으로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두 번 모두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파드레스는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지 못했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ICCsports.com, Flickr, PicApp San Diego Petco Park (2006) by iccsports 파드레스의 홈구장인 펫코파크 1969년 당시 신생팀은 파드레스,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애틀 파일럿츠(현 밀워키 브루어스) 등 4개 팀이었다. 파드레스는 첫 6년 동안 매시즌 내셔널리그 서부조 최하위에 머물렀다. 희망이 없어보였던 파드레스에 회생의 빛이.. 2010. 1. 3.
[스타 열전] 조시 베켓 조시 베켓(Joshua Patrick Beckett, 투수, 우투우타, 05/15/80, 193cm, 86kg, 199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순위 지명- 글: 정재호(전 ICCsports.com 기자), 박병기(ICCsports.com 블로거) 조시 베켓의 시작은 프로에 데뷔하면서부터 요란했다. 지난 1999년 그는 십대의 나이에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완투수였지만 그해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플로리다 말린스에 입단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것은 과거 빌 길릭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의 재능과 잠재력은 벌써부터 경쟁자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00시즌 프로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베켓은 명성만큼이나 화려한 구위를 앞세워 루키리그, 낮은 싱글A 클래스를 압도해나갔다. 0점대 방어율과.. 2009. 12. 30.
[MLB 30개 구단 역사(1)] 보스턴 레드삭스 A "Model" Fenway Day by B Tal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8년 월드시리즈에서 챔피언이 된 후 단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갖지 못했다. 이 팀이 2004년에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이 끊임없이 따라다녔을 정도다. 레드삭스의 역사를 줌인해 본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Flickr, PicAPP ■ 보스턴 아메리칸스 레드삭스는 1900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그리고 이후 서머셋, 필그림이라는 닉네임을 가졌다. 창단 후 3년 만인 1903년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챔피언이 됐다. 1919년까지 보스턴은 5차례 챔피언이 되는 등 황금기를 누렸다. 보스턴은 1907년 12월18일 레드삭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는 .. 2009. 12. 29.
[스타 열전] '빅파피' 데이비드 오티스 보스턴 레드삭스의 강타자 데이비드 오티스(1975년생)를 보면 왠지 정이 간다. 야구를 잘할 것 같지 않은 뚱뚱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얼굴 그리고 한때 무명 시절을 보냈던 선수라는 조건이 편안함을 주면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야구 팬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굿바이 홈런 및 안타를 자주 터뜨렸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도 그래서 더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 오티스는 그러나 2003년 메이저리그가 실시한 약물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100명 중 한 명인 것으로 알려져 망신살이 뻗쳤다. 오티스는 어떤 선수인지 알아본다. ☆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 오티스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에스투디아 에스파야트 고등학교에 다녔던 1992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자유계약 선수로서 사인을 해 미국으로 오게 됐다.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 2009. 12. 27.
[스타 열전] 코너웍의 마술사 톰 글래빈 배리 본즈의 홈런 기록에 묻혔지만 톰 글래빈(1966년생)은 300승에 대한 반응은 괜찮은 편이었다. 본즈의 최다 홈런 기록만 아니었더라면 글래빈의 300승은 열렬한 반응을 얻었을 것이다. 그가 2007년 300승을 기록했을 때 미 언론은 좌완 투수 글래빈을 조명하며 그의 업적을 소개했다. 팬들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공을 던지는 투수인 글래빈은 1987년 메이저리그 선수가 된 후 20년 만에 300승을 챙겼던 것이다. 왼손 투수가 300승을 올린 것은 역사상 다섯 번째 일이고 글래빈은 300승을 올린 23번째 투수가 됐다. 글래빈은 어떤 선수인지 알아보았다. 글: 밝은터(이 블로그의 블로거) 사진: PicApp ■ 최고의 컨트롤 투수 톰 글래빈의 최대 장점은 역시 컨트롤 능력이다. 미국에서는 '핀 포인.. 2009. 12. 22.
[스타 열전] 프로의 냉혹함 경험한 왕치엔밍 글: 밝은터(이 블로그의 블로거) 사진: PicAPP 만약 한국 선수가 메이저리그 플레이오프 경기 1차전에 선발로 등판했다면 한국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과거 박찬호가 선발 등판의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한국 팬들은 무척 아쉬워했는데 이후 김병현이 구원투수로서 플레이오프에 등판해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2009시즌에는 박찬호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월드시리즈 경기에 여러 차례 구원 등판해 잠시 한국에서 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바 있다. 사실 대만은 한국보다 메이저리그에 늦게 진출했지만 팬들은 이미 여러 차례 특이한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는 왕젠민으로 통하는 왕치엔밍 덕분이다. 지난 2006년 대만출신의 빅리거 왕치엔밍은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로서 플레이오프 1차전에 선발 등판해 대만.. 2009. 12. 19.
[스타 열전] 프랭크 토마스 프랭크 토마스 (Frank Edward Thomas) / 외국야구선수 출생 1968년 5월 27일 신체 키196cm, 체중125kg 팬카페 상세보기 프랭크 토마스(1968년 5월27일생)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네 번째로 타율 0.300, 500홈런, 1,500타점, 1,000득점, 1,500 볼넷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토마스에 앞서 이 기록은 세운 세 명의 선수는 멜 오트,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다. ■ 스테로이드 없었다면 매년 홈런왕 도전 프랭크 토마스는 9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홈런 타자였다. 1990년 메이저리그 데뷔를 한 토마스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9차례 홈런 부문 10위 안에 들어갔다. 2위 자리에는 4번 올랐던 그는 스테로이드가 없었다면 적어도 5차례 홈런왕이 됐을 것이다.. 2009. 12. 7.
박찬호 2010년 한국프로야구에서 뛰면 어떨까? 가족이 문제가 안 된다면 박찬호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은퇴하면 어떨까.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2009년 뜻깊은 한해를 보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것처럼 박찬호는 한국 팬들이 “보낸 많은 용기와 마음의 힘으로 훌륭한 시즌”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미국 팬들 사이에 박찬호의 존재감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다. 나이가 많고 중간계투 요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박찬호 개인의 사정과 목표가 있을테니 이런 글이 그에게 방해가 될 수 있지만 야구인 박찬호를 생각하고 한국 야구를 생각할 때 그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은퇴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 될 것이라고 본다. 미국팬들의 반응과 관계 없이 박찬호는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여러 차례 등판 경험을 했던 그다. 이는.. 2009. 11. 7.
[스타 열전] 양키스 27번째 우승 이끈 27번 지라디 감독 뉴욕 양키스의 조 지라디 감독(1964년 10월14일 생)이 양키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2008년 그는 유니폼 등번호로 27번을 선택했다. 27번은 깊은 의미가 있는 번호이다. 양키스의 통산 27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009년 11월4일(미국 기준) 양키스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4승2패로 승리해 구단 역사상 27번째 챔피언이 됐다. 지라디 감독의 등번호 27번이 더욱 빛나는 날이었다. 양키스가 조 토리 감독을 떠나보낸 후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토리가 떠났으니 아메리칸리그 동부조는 레드삭스의 천하가 됐다. 지라디도 좋은 감독이지만 토리를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기뻐했다. 첫 시즌인 2008년에는 레드삭스 팬들의 말이 맞았다. 양키스는 14년 만에 처음으로 .. 2009. 11. 5.
박찬호 無 vs. 박찬호 有 Chan Ho Park, Dodgers by iccsports 박찬호가 없었다면... 박찬호의 존재는 1990년대 한국 국민들의 생활 방식을 바꿔 놓을 정도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남성들은 그의 경기결과에 연연하며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갖게 됐고 메이저리그 매니아들도 늘어나 한때 메이저리그가 한국 프로야구 보다 더 인기를 끌기도 했다. 2009년 현재 박찬호의 인기는 메이저리그 인기와 함께 추락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코리언 특급'으로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았었더라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밝은터는 박찬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않았을 가상의 경우와 실제 상황을 꾸며 보았다. 박찬호.. 2009. 11. 1.
[추억의 인터뷰] 디즈니사 회장과 감격의 순간 인터뷰 Michael Eisner, Disney CEO, former Angels Owner by iccsports 2002년 10월28일로 기억합니다. 당해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는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당시 월드시리즈 4경기를 취재했던 필자는 7차전에 에인절스가 극적인 승리를 거둔 직후 에인절스의 구단주이자 디즈니사 회장인 마이클 아이즈너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낙 감격적인 순간이라 인터뷰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아이즈너 회장은 성실히 필자의 질문에 답을 했습니다. 아이즈너 회장은 에인절스 우승 얼마 후 구단을 히스패닉계 재벌인 아티 모레노에 팔았습니다. 매각 소문이 날 즈음에 우승을 차지해 아이즈너 구단주 입장에서는 횡재한 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인터뷰어: 박병기 인터.. 2009. 8. 26.
[Special] 이치로상과 일본 동료들의 MLB 활약상 이라부 히데키(39)가 5년 만에 미국 프로야구로 복귀한다고 한다. 물론 메이저리그 복귀도 아니고 마이너리그도 아니다. 독립리그에서 뛴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성공적으로 복귀전을 치르게 될까. 이라부가 다시 복귀하는 참에 일본 야구 선수들의 미국 진출사와 올 시즌 활약상을 한 번 정리해보았다. 이라부 히데키 (伊良部秀輝) / 외국야구선수 출생 1969년 5월 5일 신체 키192cm, 체중113kg 팬카페 상세보기 일본 출신 선수 중 메이저리그에 처음으로 나섰던 선수는 무라카미 마사노리로 그는 1964년과 65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뛰었다. 무라카미는 자이언츠에서 5승1패, 평균 자책점 3.43, 9세이브의 괜찮은 성적을 남겼다. 이후 20년 동안 일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없었고 1995년 노.. 2009. 4. 27.
[스타 열전] 데릭 지터는 앙숙 레드삭스에도 팬클럽이 있다 데릭 지터 팬클럽이 보스턴 레드삭스에 있다? 뉴욕 타임스가 24일자 기사에서 "레드삭스 내야수 중 3명은 지터 팬이다"라고 전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뛰었던 레드삭스의 내야수 저스틴 페드로이아, 케빈 유킬리스는 지터와 절친이 됐고 마이크 로웰도 마이너리그 시절 지터의 친절에 감복했던 인물이다. 내야수 3명이 양키스 스타를 팬으로서 좋아하니 라이벌 감정이 느껴지기 어려울 듯하다. 지터는 이렇게 라이벌팀 선수들 사이에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괜찮은 사람이다. 양키스를 대표하는 선수인 지터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적을 내고도 가장 조용히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선수다. 1992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양키스에 의해 1라운드 전체 6번으로 지명된 후 줄곧 한 팀.. 2009.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