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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스타 열전] '빅파피' 데이비드 오티스

by 밝은터_NJT 2009.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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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ton Red Sox David Ortiz smiles while jogging to the dug out in the third inning against the New York Yankees at Yankee Stadium in New York

보스턴 레드삭스의 강타자 데이비드 오티스(1975년생) 보면 왠지 정이 간다. 야구를 잘할 같지 않은 뚱뚱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얼굴 그리고 한때 무명 시절을 보냈던 선수라는 조건이 편안함을 주면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야구 팬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굿바이 홈런 안타를 자주 터뜨렸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도 그래서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 오티스는 그러나 2003 메이저리그가 실시한 약물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100 명인 것으로 알려져 망신살이 뻗쳤다. 오티스는 어떤 선수인지 알아본다.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

 오티스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에스투디아 에스파야트 고등학교에 다녔던 1992 시애틀 매리너스와 자유계약 선수로서 사인을 미국으로 오게 됐다.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야구를 시작한 해는 1994.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루키리그에서 246리의 타율에 홈런 2, 20타점을 기록한 오티스는 같은 리그에서 1년을 보냈다. 1 꿇었다는 의미다.

1996년에는 아예 뛰지 않았던 오티스는 그해 12 미네소타 트윈스로 트레이드됐다. 매리너스는 그의 잠재력을 높이 사지 않았던 것이다. 트레이드된 이듬 오티스는 상위 싱글A부터 시작해 더블A, 트리플A 거쳐 메이저리그까지 진입하는 급성장을 했다.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오티스는 그러나 플래툰 시스템에 묶여버렸다. , 좌투수가 나오면 벤치를 지키는 선수가 됐던 .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좌투수에 약하고 빠른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다는 '편견' 묶여 절반의 주전 선수로 활동했다.

'편견'으로 기회를 얻지 못해

 2002 그는 여전히 플래툰 시스템 안에서 있었는데 그럼에도 272리의 타율에 홈런 20, 75타점을 기록했다. 트윈스는 그러나 오티스의 성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트윈스 구단의 평가는 '1루수 수비가 좋지 않고 부상이 잦으며 빠른 공에 약하다' 것이었다. 트윈스의 테리 라이언 단장은 오티스를 트레이드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를 아무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오티스는 2002 12 트윈스에서 방출됐다. 오티스는 없이 에이전트(페르난도 쿠사, 디에고 벤스)에게 멕시코나 일본에서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오티스는 2006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트윈스에서 열심히 뛰었고 동료와도 지냈다.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모두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다. 그런데 트윈스는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레드삭스에서 있게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말했다. 오티스는 일본이나 멕시코로 가지 않고 메이저리그의 명문 구단에서 있게 됐다.



일본에서
뛰려다 레드삭스

 그러나 레드삭스도 오티스에게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트윈스 시절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지긋지긋했던 그는 티오 엡스틴 레드삭스 단장에게 노골적으로 "트레이드하든지 방출하든지 해달라" 요구했다. 엡스틴은 얼마 오티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트레이드를 단행했고 주전 경쟁을 선수였던 셰이 힐렌브랜드를 애리조나로 보내고 김병현을 받아들였다. 김병현의 레드삭스행은 오티스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결정 하나로 엡스틴 단장은 레드삭스를 살려냈다고 있다. 오티스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빅리그의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시즌 최다 홈런이 20개에 불과했던 그는 레드삭스에서 시즌(2003) 홈런 31, 101타점, 타율 288리를 기록했다. 모두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이었다. 그런데 당시 약물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였으니 성적 향상은 약물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생겼다.

 어쨌든 그는 2004년에는 홈런 41, 139타점, 타율 31리로 역시 최고 기록 경신을 했고 2005년에도 홈런(47), 타점(148)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레드삭스 단장이 중요시하는 OPS(출루율+장타율) 1.001으로 껑충 뛰었다.


버림받은 ->MLB 얼굴마담

오티스는 한때 보스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가 됐다. 보스턴에서는 언론과 팬들이 ' 파피(Big Papi)'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다. '파피' 스페인어 구어체로 '아빠'라는 의미다. 아빠같이 편안하면서도 보스턴 팬들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 오티스라는 의미로 보스턴 네이션(Boston Nation) 붙여준 별명이다. 레드삭스의 2루수인 마크 로레타는 '파피' 대해 "그에게 맞는 별명이다. 그는 동료를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해주고 항상 미소를 짓는 아빠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

 2006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하면 생각나는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데이빗 오티스'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계속된 폭발력 그리고

오티스는 2007년에도 맹활약을 펼쳤다. 레드삭스가 2007시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는데 그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것이다. 오른쪽 무릎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332리의 타율에 홈런 35, 117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OPS. 무려 1.066이었다. 포스트시즌에도 그는 37, 홈런 3, 10타점을 기록했다.

2008년부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티스는 손목 부상으로 결장이 있었고 109경기에만 출전했다. 264리의 타율에 홈런 23, 89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레드삭스에 합류한 최악의 시즌이었다. 2009년에는 더욱 심했다. 시즌 초반 28리의 타율에 머물렀던 . 삼진 아웃도 많아 레드삭스 중심타자로서 맥을 못췄다. 오티스는 그러나 6월에 홈런 7개를 치며 회복세로 돌아섰고 이후에도 매월 7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그는 2009시즌을 홈런 28, 99타점으로 마쳤다.

2009년은 그러나 그에게 최악의 시즌이었다고 있다. 뉴욕 타임스가 2009 730일자에 오티스는 약물 복용자 명단에 있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오티스는 기자회견을 열어 내가 먹은 건강보조제에 금지 약물이 있었던 같다. 알고 먹은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이에 앞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약물을 이용한 선수는 일년 동안 출전정지를 당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커리어 정리

오티스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차례 올스타로 선정됐다. 2004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MVP 뽑혔고 2005년에는 아메리칸리그 행크 애런상을 수상했다. 정규 시즌 MVP 투표에서는 2005년에 2위에 올라 수상에 가장 근접했다. 실버슬러거상은 4차례 수상했다.



 

[데이비드 오티스 프로필]

▶이름: David Americo Arias Ortiz

▶생년월일: 1975 1118  

▶출생지: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도밍고

▶키/몸무게: 6피트4인치/237파운드   

▶투/: 좌투좌타

▶수상 경력: 2004 ALCS MVP, 2005

행크 애런상, 2004/05 실버 슬러거(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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