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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 Column

70-80년대 한국복싱 중흥기를 되짚어 본다

by 밝은터_NJT 2010.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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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밝은터(ICCsports.com의 블로거)

과거 자료를 참조하지 않고 기억나는 한국 복싱은 홍수환 선수 시절부터 시작한다
. 1977년 그러니까 내가 7살 때 홍수환은 파나마의 지옥에서 온 사자라는 별명의 헥토르 카라스키야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WBC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이 됐다. 당시 흑백 TV로 생중계를 했는데 홍수환이 4번 다운됐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KO로 지지 않고 끝까지 가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홍수환 선수는 3회에 카라스키야를 몰아부쳐 KO로 승리했고 그 유명한 45기의 신화를 창조했다. 홍수환은 금세 전 국민의 영웅이 됐다. 이전에도 세계 챔피언으로서 유명세를 탔지만 45기 승리는 그를 국민 영웅으로 올려놓았다. 홍수환은 이에 앞서 1974년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때 한국에 계신 모친과의 전화통화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명언을 남겨 유명해졌다고 한다.



홍수환이 지옥에서 온 사자를 잡은 사건은 내가 복싱 팬이 되는 계기가 됐다. 나는 광적인 복싱팬이 됐다. 친구도 복싱을 좋아하는 친구만 사귀었고 나는 WBC, WBC 챔피언 이름은 물론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든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다녔다. 예를 들어, WBC 밴텀급의 세계 랭킹 5위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즉각 대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홍수환 이전에는 김기수, 유제두, 염동균과 같은 선수가 세계 챔피언이 되어 복싱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일들은 그저 과거 자료를 통해서만 알 수 있어서 내 기억 속에는 없다. 이는 순전히 내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김성준 선수 승리 관련 동아일보 기사.


복싱에 푹 빠져서 살 때 복싱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핀 선수는 김성준이었다. 최저체중의 라이트 플라이급 선수였던 김성준은 1978년 서울에서 열린 보라싱과의 경기에서 3회에 통쾌한 KO승을 거두고 WBC 챔피언이 됐다. 당시 승리거둘 때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인으로는 다섯 번째 챔피언이었다. 김성준 선수는 이후 3차 방어까지 성공을 했지만 일본에서 열린 나카지마 시게오와의 경기에서 졸전을 벌이고 15회 판정패를 당했다. 나카지마 선수는 그리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김성준 선수는 경기 내내 힘없는 복싱을 하며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래도 그가 4차 방어까지 가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후 챔피언 홍수시대가 왔다. 김상현(WBC 슈퍼라이트급), 박찬희(WBC 플라이급), 김태식(WBC 플라이급), 김철호(WBC 슈퍼 플라이급), 김환진(WBA 주니어 플라이급), 장정구(WBC 라이트 플라이급) 등이 세계 챔피언에 오르며 한국 복싱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김상현 선수는 솔직히 잘 기억에 남지 않고 나머지 선수는 열심히 응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박찬희 선수는 영웅적인 존재였다. 내가 살던 동네 근처에 그가 연습하는 복싱 체육관이 있다는 말에 더욱 그의 팬이 됐다. 멕시코의 미겔 칸토 선수에 15회 판정으로 승리해 WBC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박찬희 선수는 아마추어 국가대표를 거쳤기에 기본기에 충실한 복싱을 했다. 박찬희 선수는 5차 방어에 성공했히지만 6차 방어전에서 오쿠마 쇼지(일본)에 패해 챔피언 타이틀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 오쿠마 쇼지에 계속 도전을 했지만 번번이 무너져 그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했다.



돌무먹김태식도 대단한 선수였다. 그는 1980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WBA 플라이급 타이틀 경기에서 파나마의 루이스 이바라에 2회에 KO승을 거뒀다. 2회에 강펀치를 작렬하며 쉽게 승리를 거두고 전국민을 기쁘게 했다. 그는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 복서는 역시 장정구였다. 라이트 플라이급의 장정구는 1983년 세계 챔피언이 된 후 1988 15차 방어전을 치른 후 타이틀을 반납했다. 15차 방어전에 성공한 그는 2002 20세기를 빛낸 복서 중 한 명으로 뽑혔을 정도로 대단한 복서였다. 그후 한국 복싱사에 남을 선수는 바로 유명우였다. 펀치는 강하지 않았지만 속사포 타법으로 그는 1985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후 1991년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 패할 때까지 무려 18차 방어전까지 치렀다. 그는 이후 이오카에 타이틀을 다시 빼앗고 은퇴했다. 유명우 선수가 한국 복싱 중흥기의 막차를 탔다고 할 수 있다.



유명우가 놀라운 방어 행진을 하고 있던 사이에 인기 있는 선수는 문성길이었다
. 문성길 선수는 프로에 데뷔해서 세계 챔피언이 됐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허영모라는 선수와의 라이벌 대결이다. 두 선수는 아마추어 복싱에서 최고의 인기 선수였는데 이들의 3라운드짜리 아마추어 경기는 프로경기보다 더 인기가 높았다. 두 선수의 라이벌전은 항상 복싱 경기장을 꽉 채웠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면 스포츠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허영모는 전통적인 테크니션이었고 문성길은 펀치력으로 승부하는 선수였다. 일간스포츠는 몇 년 전 두 선수의 라이벌 대결을 역대 스포츠 라이벌 순위 5위 안에 넣을 정도이니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성길은 프로에 데뷔해 두 차례 세계 챔피언이 됐지만 허영모는 프로로 전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인기 복서 중 한 명은 박종팔이었다. 나는 박종팔 선수를 좋아했는데 그는 IBF슈퍼 미들급 챔피언이었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한국 선수로 기록됐다. 입담이 좋았던 박종팔 선수는 1984년 미국의 서덜랜드에 승리한 후 비니 커토, 린델 홈즈, 마빈 맥 등을 누르고 8차례 방어에 성공했고 1987년엔 멕시코의 헤수스 가야르도에 승리하고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그는 80년대 한국 중량급 복서 중 최고의 선수였다.


박종팔과 백인철의 라이벌 대결

수많은 IBF 챔피언이 탄생했지만 당시에는 WBC WBA 챔피언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했고 동양챔피언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으로 여겨졌다. WBA, WBC 챔피언이 점점 사라지자 복싱에 대한 인기도 시들했고 특별한 라이벌도 슈퍼스타급 선수도 탄생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WBA, WBC 챔피언이 간간이 탄생했지만 바닥으로 추락한 인기는 떠오를 줄 몰랐다.

챔피언이 되지 않았지만 김득구 선수의 경기는 평생 잊을 수 없다. 1982 1113(한국은 14)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레이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김득구는 혈투를 벌이다가 14라운드에 다운을 당했고 이후 뇌사 상태에 빠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경기는 명승부 그 자체였다.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WBA 라이트급 챔피언 맨시니를 상대로 김득구는 놀라운 경기를 펼치며 미국 땅에서 한국 선수의 첫 승리를 기대케 했다. 김득구는 그러나 경기 후반이 힘이 빠져 일방적으로 맞았고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그만 무너졌다. 김득구의 사망은 어린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줬다. 남의 죽음에 그렇게 마음이 아팠던 것은 처음이었다.

김득구 vs. '붐붐' 레이 맨시니 1라운드부터 14라운드까지












[틀린 기억과 자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댓글로 바로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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