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del" Fenway Day by B Tal
보스턴 레드삭스는 1918년 월드시리즈에서 챔피언이 된 후 단 한 번도 챔피언 타이틀을 갖지 못했다. 이 팀이 2004년에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이 끊임없이 따라다녔을 정도다. 레드삭스의 역사를 줌인해 본다.
글: 밝은터(ICCsports.com 블로거) 사진: Flickr, PicAPP
■ 보스턴 아메리칸스
레드삭스는 1900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그리고 이후 서머셋, 필그림이라는 닉네임을 가졌다. 창단 후 3년 만인 1903년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챔피언이 됐다. 1919년까지 보스턴은 5차례 챔피언이 되는 등 황금기를 누렸다. 보스턴은 1907년 12월18일 레드삭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는 레드 스타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보스턴은 이후 기자들이 계속 '레드 삭스'로 바꿔 기사를 송고하면서 레드 삭스가 됐다. 당시에는 선수들이 신는 양말 색깔로 팀 이름을 정하는 게 유행이었다.
Fenway Park Tour, Opening Day (-Eve) 2009: Hall of Fame plaque for Babe Ruth, 1914-1919 by Chris Devers
■ 베이브 루스를 보낸 후
레드삭스 황금기의 일부인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베이브 루스는 이 팀의 3할 타자로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는 전성기에 들어가기 직전의 선수였다. 이때 레드삭스의 구단주인 해리 프레이지는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보냈다. 1920년 1월2일의 일이다. 프레이지는 브로드웨이 연극 개최 자금 마련을 위해 현금과 루스를 맞교환했다. 루스는 트레이드된 첫해에 홈런 54개를 때려냈고 이듬해에 59개를 기록해 미전국 야구팬을 흥분케 했다.
Babe Ruth by ceetard
■ 밤비노의 저주
베이브 루스의 별명은 밤비노였다. 밤비노의 저주라는 표현은 보스턴 글로브지의 댄 셔니시 기자가 1990년 기사에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이에 앞서 1986년 월드시리즈에서 레드삭스가 다 이긴 경기를 야수의 결정적인 실수로 놓치자 뉴욕 타임스의 조지 베시 기자가 "베이브 루스의 저주가 다시 그들을 쳤다"라는 내용을 써 레드삭스의 '트레이드 실수'를 조롱했다. 당시 레드삭스는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 가뭄에 시달렸던 반면 양키스는 루스를 받아들인 이후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단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2004년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후 '밤비노의 저주'는 거론되지 않았다.
ted williams by jpangan3
■ ‘테드 삭스’
레드삭스는 루스를 보낸 후 결정적인 영입에 성공했다. 1939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소속이었던 테드 윌리엄스를 영입했던 것. 윌리엄스는 이후 1960년까지 레드삭스에서 뛰고 은퇴했다. 그는 야구 역사상 몇 안 되는 단타, 장타 모두를 잘 때려내는 왼손 타자였다. 그는 1952년과 53년에 연속으로 4할 타율을 기록해 마지막 4할 타자가 됐다. 19시즌을 뛰면서(3년 동안은 입대해 세계 2차 대전에 참전) 그는 홈런 521개, 2654안타, 타율 3할4푼4리를 기록했다. 그의 평균 OPS(출루율+장타율)는 무려 1.015이었다. 윌리엄스의 맹활약에도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에 단 한 번 진출했는데 이 팀은 1946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3승4패로 아깝게 졌다. 당시 기자들은 레드삭스를 테드(Ted) 삭스로 불렀다.
■ 60-80년대="예스" 시대
테드 삭스 시대가 끝나고 레드삭스는 "예스" 시대를 맞았다. 칼 예스트렘스키yastrzemski가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 그는 1961년 메이저리그 데뷔를 해 1983년까지 '빨간 양말'을 신고 뛰면서 3,419안타, 홈런 452개를 기록했고 무려 18차례나 올스타로 선정됐다. 레드삭스는 그러나 60년대에 한 차례 70년대에 한 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신시내티 레즈와 카디널스에 3승4패로 애석한 패배를 당했다. 레드삭스는 80년대 후반 조 모건을 감독으로 기용해 잠시 반짝했지만 이 후 성적의 널뛰기가 이어졌다.
90년대는 댄 듀켓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듀켓은 레드삭스의 단장이었다. 듀켓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팜 시스템을 재건해야 한다'고 선언했고 이후 마이너리그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으로 노마 가르시아파라, 칼 파바노, 데이비드 엑스타인 등이 메이저리거로 성장했지만 로저 클레멘스, 모 본이 자유계약 시장으로 걸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은 단장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듀켓 단장이 클레멘스에 대해 "야구 인생의 황혼기에 있다"는 말을 한 것은 큰 실수였다. 듀켓은 레드삭스가 3차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도록 이끌었지만 이 팀은 세 번 모두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듀켓이 몰두했던 것은 '극동 지역 스카우팅'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조진호, 김선우, 송승준, 안병학, 채태인, 이상훈 등이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러나 결과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존 헨리가 레드삭스 구단을 2002년에 사들인 후 대변혁이 일었다. 헨리는 2002년 2월28일자로 듀켓 단장을 해고했고 그해 말 예일대 출신의 28세의 젊은 단장인 티오 엡스틴에 레드삭스 살림살이를 맡겼다. 헨리는 오클랜드의 빌리 빈에게 단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곧바로 엡스틴을 단장으로 임명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좋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연소 단장이 된 엡스틴은 전통적인 경영방법과 세이버메트릭스를 잘 버무려서 레드삭스를 튼튼한 구단으로 만들었고 이 팀은 2004년 마침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다.
레드삭스는 그러나 '양키스 스타일'로 필요한 선수를 돈으로만 영입하는 데 익숙해져가는 것 아니냐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 레드삭스는 일본의 괴물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영입하고자 무려 5천110만 달러를 들여 계약 교섭권을 획득해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마쓰자카는 신인 시즌에 15승12패, 9이닝 평균 자책점 4.40, 탈삼진 201개를 기록했다.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결승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를 만나 4전전승으로 승리를 거두고 4년 만에 2번째 챔피언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레드삭스는 2008년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존 레스터의 쾌투에 힘입은 레드삭스는 에인절스에 3승1패로 승리하고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는데 결승에서탬파베이에 1승3패로 뒤지다가 3승3패로 타이을 이뤘지만 최종 7차전에서 3-1로 패해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레드삭스는 2009시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뤘지만 1라운드에서 에인절스에 3전 전패를 당하고 탈락했다.
■ Summary
레드삭스는 1908년부터 2009년까지 월드시리즈 우승 6회, 페넌트 레이스 우승 10회, 플레이오프진출 19회의 기록을 남겼다. 2000년대의 레드삭스는 1910년대 이후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드삭스는 2000년대에 6번이나 플레이오프에 나갔고 월드시리즈 챔피언 2회 등극의 기록을 세웠다. 레드삭스는 1910년대에 4차례나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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