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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MLB 30개구단 역사

[MLB 30개 구단 역사(3)] 시카고 화이트삭스

by 밝은터_NJT 2010.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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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시카고에서 첫 경기를 가진 시기는 1900 42일이다. 당시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Stockings)라는 이름으로 일리노이대와 첫 경기를 가진 이 팀은 10-9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Chicago White Stockings Baseball Team, 1902
Chicago White Stockings Baseball Team, 1902 by Boston Public Library 저작자 표시
1902년 화이트스타킹스 선수들
 

20일 후 화이트 스타킹스라는 이름을 화이트 삭스로 개명한 이 팀은 4월 말부터 프로 야구 경기를 갖기 시작했고 첫 해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공식 우승은 아니었다. 아메리칸리그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901년부터다. 아메리칸리그 구단주들은 1901 128일 시카고에 모여 리그를 메이저리그의 두 번째 리그로 공식 선언했는데 이것이 인정됐고 이후 내셔널리그는 1903년부터 아메리칸리그 챔피언과 월드시리즈를 갖기로 하는데 합의했다. 화이트삭스는 아메리칸리그의 태동과 월드시리즈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화이트삭스 역사

 

화이트삭스가 2005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기 전에 이 팀은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적이 없다고 오해하는 야구팬들이 많았다. 이 팀은 1906년 월드시리즈에서 동향의 라이벌 시카고 컵스에 42패로 승리했고 1917년 월드시리즈에서는 뉴욕 자이언츠에 42패로 승리하고 챔피언이 된 적이 있다. 월드시리즈 2회 우승을 했던 팀이다.

 

화이트삭스는 그러나 1919년 ‘블랙 삭스 스캔들’이 발생한 이후 리그의 동네북이 됐다. 1921년부터 1959년까지 단 한 번도 1위에 오르지 못했던 것. 이 기간 화이트삭스의 아메리칸리그 순위는 6-8위였다. 1959년 앨 로페스 감독이 이끌었던 팀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한풀이를 했지만 LA 다저스에 패한 이듬해부터 추락했다. 화이트삭스는 이후 1983년이 되어서야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토니 라루사 감독이 이 팀을 24년 만에 포스트 시즌으로 인도했지만 화이트삭스의 성공 후 슬럼프는 다시 찾아왔다. 10년 동안 플레이오프 소식이 없었던 것. [관련 글: 블랙삭스 스캔들]

 

1993시즌 MVP였던 프랭크 토마스(아래 사진), 아지 기옌(유격수) 등을 중심으로 팀을 만든 화이트삭스는 바뀌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2005년까지 3차례 포스트 시즌을 경험했던 것이다. 화이트삭스의 인기 유격수였던 기옌이 2004년 감독 자리에 오르면서 막강해진 이 팀은 기옌 집권 2년 만에 리그 최고의 팀이 됐다. 그리고 2005년 마침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다.

Cubs v White Sox

화이트삭스 구단주

 

농구팬이라면 제리 라인스도프(아래 사진 오른쪽)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인스도프는 그 유명한 시카고 불스의 구단주이다. 마이클 조던과 필 잭슨에게 매달 수표(check)를 줬던 그 사람이 바로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다.

라인스도프는 스포츠계의 짠돌이로 잘 알려졌다. 불스가 NBA를 지배했던 당시 잭슨 감독의 연봉 대폭 인상 요구를 거절해 그를 떠나게 했는데 이는 조던 은퇴의 원인이었고 불스 구단은 와해했다. 라인스도프는 불스의 성공을 통해 엄청난 부를 챙겼지만 이를 선수에게 환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비난을 받았던 인물이다.

 

1980년 화이트삭스의 구단주가 된 라인스도프는 돈벌이에는 천재적인 감각을 가졌는지 구단주가 된 이후 코미스키 파크의 재건축(이후 U.S. 셀룰러 필드로 개명)과 유나이티드 센터(농구)의 건립을 이끌어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한 것은 라인스도프의 배경도 한몫 했다. 그는 변호사 겸 CPA였고 부동산 감정가이자 모기지 출자자였다. 1936년생인 라인스도프는 조지 워싱턴대 출신이다.   

 

 

ALDS game 4 - White Sox pregame Voodoo
ALDS game 4 - White Sox pregame Voodoo by guano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화이트삭스 스타

 

화이트삭스의 대표적인 스타는 역시 프랭크 토마스다. 토마스는 1993 MVP 투표에서 1위표 28개를 모두 받았고 이듬해에도 2위에 압도적으로 앞선 MVP 수상자가 됐다. 토마스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라이언 하워드와 같은 선수였다. 그는 타점 기계였고 타율도 높은 홈런 타자였다.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칼튼 피스크가 화이트삭스의 최고 스타였다. 70년대 보스턴 레드삭스 스타였던 피스크는 1981년부터 1993년까지 화이트삭스에서 뛰었는데 이곳에서 4차례 올스타로 선정됐고 명예의 전당에도 화이트삭스 선수로서 입성했다. 피스크는 마이크 피아자가 포수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가장 많은 롱볼(351)을 날린 안방마님이었다.

 

20세기 초반 화이트삭스의 스타는 ‘슈리스(Shoeless)’ 조 잭슨(아래 사진)이었다. 잭슨은 통산 타율 356리를 기록한 위대한 타자였지만 ‘블랙 삭스 스캔들’에 연루돼 일찌감치 야구를 접었고 은퇴한 후에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가 ‘슈리스’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1908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열린 한 야구 경기에 스파이크(신발)로 인한 물집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때 팀이 그의 출전을 간절히 원하자 양말만 신고 타석에 들어서 3루타를 친 이후부터다.


City of Chicago

 

시카고는 야구팬 분포로 보면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시카고 북부는 컵스팬이 대부분이고 남부에는 화이트삭스 팬이 많다. 북부 지역의 컵스팬들도 화이트삭스의 2005년 월드시리즈 진출과 우승에 관심을 보였다는 보도 내용도 있었지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의 마티 번스 기자는 시카고 현장 취재를 통해 “팬층은 여전히 극명이 나뉘어져 있다”고 보도했다. 불스나 시카고 베어스(NFL)가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을 때와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진출 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8인의 아웃(Eight Men Out)'이라는 영화에서 ’슈리스‘ 조 잭슨의 역할을 맡았던 존 쿠삭이 2005년 화이트삭스 구단에 티켓 문의를 했다가 퇴짜를 맞은 것은 바로 그가 2003년 “나는 컵스팬”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뉨의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가 위치한 곳은 백인들의 거주비율이 높아 컵스는 백인들과 화이트칼라 계통의 사람들이 선호하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은 흑인들의 거주 비율이 높은 곳에 있어 흑인과 블루칼라 팬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미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화이트삭스 팬이다.

All-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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