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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 Column/추억의 칼럼

[추억의 칼럼] 제1회 WBC와 제2회 WBC

by 밝은터_NJT 2010.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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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제2회가 끝난 후의 상황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래 내용은 제1회 때 제가 쓴 글과 제2회의 글을 종합해본 내용입니다. 

글/사진: 밝은터 (ICCsports.com 블로거) 

Chan Ho Park, the Closer, during 2006 WBC
Chan Ho Park, the Closer, during 2006 WBC by iccsport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회 WBC 당시


미 언론의 관심도 
 제1회와 2회는 연속으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2006년과 2009년에 열린 두 대회는 미 주류 언론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ESPN을 통해 미 전국으로 중계돼 야구팬들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불미스러운 심판 판정도 있었고 엉터리 대진표 작성으로 피해가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첫 대회였다. 

 미 언론의 관심은 자국 리그에 있었다. 특히 NCAA 토너먼트(대학농구)가 열리는 바람에 WBC는 언론 기사에서 찬밥이었다. WBC는 미 언론 입장에서는 돈이 안 되는 대회다. 축구 월드컵도 그렇다. 한국도 그런 면이 있지만 미국은 돈이 되야 언론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스포츠 분야는 그게 철저하다. 제3회 대회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미주 한인 사회 관심 집중 
 미국 한인 이민자들은 2002년 월드컵 축구, 2006년 월드컵 축구, 그리고 2006년 WBC에 이어 2009년 행사를 즐겼다. 2006년 당시 한국이 8강전에서 일본을 눌렀을 때 미주 한인 사회에서 WBC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였다. 2009년 대회에도 비슷했다. 

 대회가 무르익어 가자 온통 WBC 이야기였다. WBC 1라운드 때까지만 해도 대회가 열린 줄도 몰랐다는 지인은 “WBC가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가족과 함께 여러 명이 함께 보니 더욱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에는 한국은 짜증나는 정치 이야기로 국민이 힘들었고 미주 동포들도 힘들어했다. 2009년에는 경제의 어려움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2006년과 2009년 WBC가 잠시나마 머리를 식히고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도록 하는데 도움이 됐다. 

 2006년에 미주 동포들의 단결된 모습은 미 주류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2009년 대회에서는 한국 팬 없이는 대회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여론이 일 정도였다. 미국 팬들은 한국인의 에너지 넘치는 응원에 감동했다. 2006년 일본과의 4강전은 우중 경기로 펼쳐졌지만 한인 팬들의 응원 열기는 식지 않았는데 이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9년 무려 5차례나 일본과의 대결에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1만 명에서 3만 명의 한인들이 경기장을 찾았는데 이에 대회 관계자들이나 미국 팬들은 놀라워했다. 



야구에 대한 관심 높아져 
 2006년 당시 일본과의 4강전이 열리는 중에 나는 여러 차례 전화를 받았다. 지인들은 갖가지 질문을 쏟아냈다. "야구가 9회까지 하는 것이 맞느냐?" "서재응은 왜 뺀 거냐?" "김병현은 왜 그렇게 오래 마운드에 있게 했냐?"는 등의 질문을 받은 것. 

 평소 야구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 궁금한 게 많았던 것이다. 야구가 몇 회까지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경기를 봤을 정도이니 그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인이라면 대부분 야구 경기를 봤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2009년 대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필자의 자녀와 조카가 야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2006년 당시만 해도 너무 어려서 야구를 즐기기 어려웠지만 이제 초등학생이 되고 나니 야구가 뭔지를 알고 WBC를 보니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대회 중에 조카 진우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과의 결승전을 봤냐”고 물었더니 “이치로의 안타로 아깝게 졌다”고 말했다. 

 나의 자녀와 조카 진우는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영어가 더 편하다. 이들은 영원한 한국 야구 팬이 된 것이다. 경기장을 찾아갔을 때도 젊은이들은 대부분 영어가 편한 사람들이었다. 이것보다 더 좋은 한국 문화 교육, 한국 정체성 교육은 없는 것 같다. 

밝은터와 가족들
미주 한인들에게 자부심
 2006년 WBC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미주 한인들은 항상 "한국 야구는 더블A 수준"이라는 말을 들었다. 기를 펼 수 없었다. 그 말에 세뇌되어 우리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익숙해 있었다. 2006년 당시 '미국전을 제치고(그냥 지고) 일본전에 전력을 다 쏟는다'는 기사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당시 한국이 놀라운 승리 행진을 하자 최소한 국가 대표의 수준은 메이저리그 급이라는 생각을 팬들이 갖게 됐다. 주류 언론 기자들도 '원더풀 코리아'를 외쳤다. 이는 또한 한인 1.5세, 2세들이 어깨를 으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이러한 자부심과 반응이 업그레이드됐다. 미 언론에서는 “이렇게 잘하는 한국 선수들이 왜 메이저리그에서 안 뛰냐”는 뒤늦은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스카우트들은 “우리가 한국 야구를 잘못 본 것 같다”고 회개(?)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으로 남게 된다. 


더 많은 한국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 기대
 팬들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2006년 당시 팬들은 그럴 일이 자주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승엽, 박진만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2006년 당시 ESPN의 분석가로 활약한 에릭 캐로스는 박진만에 대해 "이 대회에 참가한 유격수 중 가장 수비가 좋다"고 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의 미국 진출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여전히 한국 야구는 저평가 됐고 한국 선수가 미국에 진출하기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자유계약 선수 제도나 군 문제 등이 한국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막았다. 그러한 문제는 2009년에도 남아 있다. 메이저리그의 관심은 높아지겠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프로야구 시스템과 사회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것은 쉬워보이지 않는다. 추신수 등 한국 선수 4명과 관련된 병역 특례에 대한 여론이 모아지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 야구 발전의 계기 
 2006년 WBC에서의 성공은 한국 프로야구가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2009년 WBC의 성공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야구장으로 몰려드는 팬들의 수가 늘어날 것 같다. 2006년 4강전이 열리던 날 서울 잠실 야구장은 '합심 응원'을 하는 팬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2009년 결승전이 열리던 날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2006년에 김인식 감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됐다. 2009년에는 그런 명성을 ‘굳히기’ 했다. 

 2006년에 한국도 한미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열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됐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 스타들과 한국 프로야구 스타들의 대결은 상상만 해도 멋진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2009년에는 그럴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돔구장 건립이 필요하다. 다목적 돔구장을 세워 야구와 축구를 할 수 있고 팬들이 많이 오는 중요한 농구 대회(예를 들어 NBA 올스타 초청 등)를 개최한다면 돔구장은 스포츠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것 같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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