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와 관련돼 뛰는 젊은이 두 명이 있었다. 한 사람의 꿈은 메이저리그 구단 단장(General Mangaer)이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의 꿈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위한 스포츠 에이전트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중년의 나이가 됐을 때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주인공은 스캇 보라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한인 직원 박승현 씨와 LA 다저스 구단 아시아부에서 일하는 정윤현씨.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박승현씨는 선수를 위해 구단으로부터 더 많은 연봉을 받아내는 역할을 정윤현씨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는 구단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취재일자는 2002년 초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취재/글: 박병기(ICCsports.com․빅리그 편집장) 사진: 권처용(ICCsports.com)
취재장소: 미주 중앙일보 본사 회의실/다저스 경기장
Scott Boras and Seung Hyun Park (박승현) by iccsports
“야구가 너무 좋아요.”-박승현 (스캇 보라스 코오퍼레이션 한국인 직원)
야구가 좋아 미국 유학을 택한 한국인 청년 박승현 씨. 그는 현재(2002년 당시) 박찬호의 에이전트로 활동 중인 스캇 보라스 씨가 운영하는 스캇 보라스 코오퍼레이션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국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던 박승현씨는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 고민하다가 ‘스포츠’ 분야에서 평생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스포츠와 관련된 전문적인 학과가 있지 않았다. 잠시 풀어 죽어 있던 박승현씨는 부친으로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는 ‘승인’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97년의 일이다. 1년 동안 ESL(영어를 제2외국어로 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 과정을 거친 뒤 98년부터 University of Massachusettes, Amhurst (보통 U-Mass라고 부른다)에서 스포츠 경영학을 공부하게 된 박승현씨는 99년 여름 보스턴 레드삭스의 인턴으로 활약하면서 조진호 선수의 통역역을 맡고나서 본격적으로 야구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로 생각했던 터라 그가 스포츠 경영학을 공부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야구 경영’을 위한 공부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포츠 매니지먼트, 환상을 깨라
레드삭스 산하 트리플A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표 판매, 청소 등 못해본 일이 없다는 박승현씨는 “스포츠 매니지먼트 분야가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다”라며 “만약 그런 환상 때문에 이 분야에 뛰어들려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U-Mass에 다닐 때 교수님들이 처음에 가장 강조 했던 것이 ‘환상을 깨라’였습니다. 미국의 경우 스포츠 매니지먼트를 하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분야에서 급여를 받고 일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위 ‘풀타임’으로 일거리를 갖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보수를 받지 않는 일거리라도 ‘경험’을 위해 잡으려고 합니다. 또 그 ‘일자리’가 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요.”
그는 U-Mass에 다니면서 이상훈 선수의 통역역을 맡기도 했다. 야구와 관련돼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에 이력서를 보냈다. 스캇 보라스 사무실에도 같은 이력서를 보냈다.
‘슈퍼 에이전트’ 보라스씨와의 인연은 조금은 특별하다. U-Mass에 다니던 시절 교수가 준 과제는 ‘스포츠 관련 유명 인사 중 한 명을 선택해서 프로필을 쓰는 것’이었는데 박승현씨는 보라스씨를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언젠가 베이스볼 위클리 잡지를 보니 보라스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자세히 읽어 봤는데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보라스씨에 대한 조사 자료를 숙제로 제출했지요. 자료를 여기 저기서 모아 20장짜리 리포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스캇 보라스 코오퍼레이션에 이력서를 보내면서 그 숙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보라스씨 사무실에서도 모르는 내용이 리포트에 들어 있었던 것이 좋은 인상을 남겼고 제가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4년 전 도미 했을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스포츠가 좋아 막연히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데 스포츠와 관련된 직장을 된 것에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내비췄다. 스캇 보라스 코오퍼레이션에서 일하게 된 것을 “하늘의 인도”라고 표현하는 그는 열성적인 신자는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인간이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늘이 기회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가끔 신문을 통해 이름이 나가면서 “에이전트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는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박승현씨는 “나도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답변해주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입장”이라고 부가 설명까지 한다.
“에이전트는 통계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스캇 보라스 코오퍼레이션이 연봉 중재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바로 이 통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수년전 앤드류 존스(당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연봉 중재 때도 1875년의 자료부터 뒤져서 역사상 위대한 선수들과 비교를 했지요. 어린 나이에 골드글러브를 여러 차례 수상했고 그가 어린 나이에 행크 애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기록을 가졌다는 것을 자료로써 연봉 중재관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사무실에는 데이터베이스 관리 요원이 있는데 필립 디그레고리 씨라고 전에 미우주 항공국(NASA)에서 근무하신 분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그 분은 챌린지 호 추락 사고로 인해 NASA의 인원 감축이 있었고 그때 그만 두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사무실로 오셨죠.”
Scott Boras by iccsports
보라스는 야구의 사탄? 아니죠.
그는 보라스씨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솔직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라스씨에 대해 ‘야구의 사탄’이라고 까지 비난을 하더군요. 하지만 옆에서 그 분을 지켜보면서 잘못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보라스씨가 정말 돈만 밝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회사를 오래 전에 처분했을 것입니다. 보라스씨는 수년 전 스포츠 매니지먼트사의 합병(merger)이 유행했을 당시 한 회사로부터 수천만 달러에 회사를 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선수들을 위해 일하는 회사를 만들고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었고 자신의 열정을 돈과 맞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평생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수천만달러를 받았을 겁니다.”
그는 보라스씨의 협상 방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문 지상에 보면 우리가 얼마를 약속 받기 전에는 사인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가는데 사실 저희는 협상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구단들에게 보내고 이런 선수인데 오퍼를 기다리겠다고 하지요. 즉, 먼저 선수의 몸값을 정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박찬호 선수도 지난 시즌 중에 2천만 달러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저희 사무실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LA 타임스 기자가 ‘2천만 달러를 요구하지 않을까’라는 기사를 썼고 그 이야기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지면서 ‘보라스는 2천만 달러를 요구할 것이다’로 발전한 것이지요.”
Greg Maddux by leath |
메이저리그 선수들 정보 관리가 주업무
보라스 사무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정보 관리”라고 답변했다.
“저희는 선수들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기 몇 년 전부터 자료를 준비합니다. 지난 번 나온 박찬호 X-파일도 오랜 기간 준비된 것이지요. 제가 하는 일은 그런 자료가 나올 수 있도록 정보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현재 제가 정보 관리를 맡고 있는 선수는 케빈 밀우드, 제프 위버, 제이슨 배리텍, 그렉 매덕스, 카를로스 바이에가 등입니다. 물론 한국 선수들과의 컨택 및 정보 관리도 제가 하고 있습니다. 정보 관리라고 하면 각종 개인 기록에서부터 신문 보도 내용 정리 등이 있습니다.”
과거로 올라가서, 그는 군복무 기간 중 앙골라 UN 평화 유지군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평화유지군의 정전관리 업무에 참여했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그곳에서 우리가 영유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지를 절감했습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곳 아이들은 군인 슬리퍼를 주면 좋아하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깡통(can)을 서로 가지려고 싸웁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삶에서 얼마나 감사를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솔직히 거창한 목표는 없습니다. 스포츠 분야에서 계속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며 소박한 꿈을 밝혔다.
박승현 씨는 이후 보라스 사무실을 떠나 통계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메이저리그 전문가 칼럼을 연재해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첫 한국인 GM이 되고 싶어요-정윤현(LA 다저스 아시아부 직원)
그의 경력은 조금은 특이하다. 9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대학(캘스테이트 LA)에서 야구 선수(투수)로 활약했던 정윤현(2002년 당시 30세. 미국명 커티스 정)씨는 한국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스(기아의 전신) 2군에서 뛴 특별한 경력의 소유자다.
‘배우’ 차승원씨와 쏙 빼 닮은 정윤현씨의 꿈은 메이저리그 구단 단장(GM)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야구를 일찍 접고 GM이 되기 위한 출발을 했다. 바로 한국에서 97년 시즌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대학원을 가기로 결정한 것. 98년 오하이오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 스포츠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다저스 구단의 아시아 부에 입사했다.
기자는 일단 한국에서 지내던 시절에 대해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선 주로 2군에서 활동했고 1군에는 한 일주일 정도 있었죠. 고생을 하고 미국에 오게 된 겁니다. 파워 피처도 아니었고 컨트롤이 좋은 투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군에 머물렀지 않았을까요? (웃음) 변화구를 많이 던졌던 투수였습니다.”
어린 시절 미국 이민을 갔기 때문에 성인이 돼 한국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엔 정말 문화적으로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미국에선 아무래도 운동을 하다 보니까 주로 미국인들과 사귀었기 때문에 한국어, 한국 음식 등이 낯설었지요. 특히 제가 머물렀던 곳은 광주인데 사투리도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년쯤 되니까 적응이 되더라구요.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됐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국말도 많이 배우게 됐고 문화와 예절에 대해서도 배우게 됐지요. 한국 음식도 좋아하게 됐어요.”
정윤현씨는 해태에서 함께 하던 친구들 중에 기억나는 선수가 많다고 한다.
“이대진 선수와 친하죠. 저보다 2살 어린데 전에 어깨가 아파 미국에 왔을 때 제가 도와줄 정도로 친하구요. 한국에서도 물론 친하게 지냈구요. 최상덕 선수는 저보다 한 살 더 많은데 한국에서 저에게 잘해줬습니다.”
한국에 간 것은 자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는 정윤현씨는 당시의 경험이 다저스에서 일할 수 있게 해줬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 한국에서의 경험이 자신을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고 한다.
다저스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2000년에 대학원 졸업을 하고 5월에 다저스 구단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죠. 제가 하는 일이 저에게는 꼭 맞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저스의 팬이었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또 한국쪽 일을 관리하기 때문에 제 관심사인 한국 야구와 미국 야구를 동시에 접할 수 있어 좋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LA에서 줄곧 살았기 때문에 다저스 팬이었다는 정씨는 전 다저스 투수 라몬 마르티네스를 가장 좋아했다.
“라몬 마르티네스는 5-6년 동안 다저스의 에이스였는데 깡마른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저렇게 날씬한 사람도 공을 빨리 던질 수 있구나, 나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종 목표가 메이저리그 구단 단장(GM)인 정씨는 아시아부서의 총책임자, 인터내셔널부서의 총책임자가 된 후 구단의 단장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초의 한국인 GM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야구를 끝내고 난 후에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 석사 학위가 있으니까 박사 학위를 받아 젊은 사람들에게 스포츠에 대해 가르치고 싶습니다. 현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국에서 야구를 하다가 한국으로 가 프로야구 2군팀에서 활약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원에 진학한 후 다저스 구단에서 근무를 하게 된 ‘평범치 않은’ 삶을 산 것에 대해 부모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집에서 제가 막내거든요. 아버지(정기호)와 어머니(이명자)는 LA 인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계시죠. 나이가 많으셔서 이제 은퇴를 하셔야 하는데 제가 아직까지는 도움이 많이 못 되네요. 부모님께서 제가 하는 일들을 잘 이해해주셔서 원하는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적극 지원해주셨습니다.”
다저스의 신임 단장 댄 에반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사람입니다. 에반스는 구단의 단장이고 저는 아직 말단 직원인데도 저에게 의견을 물어보더라구요.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 보다 잘 났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고 야구에 관련된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일을 합니다. 저도 에븐스씨처럼 되고 싶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일하는 모습은 좋은 것 같습니다.”
한국의 다저스 팬들은 다저스의 오프 시즌 움직임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하자 정씨는 “구단이 이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이제 마이너리그에서 부터 기초를 쌓으면서 구단이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박찬호 선수가 떠난 것은 정말 아쉽다. 그는 한국인들이 야구를 볼 수 있게 해준 선수인데 그가 떠나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박찬호 선수는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보기에 좋았습니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독립심이 강한 선수였습니다. 빅스타가 됐지만 항상 열심히 해서 미국 사람들도 박찬호 선수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떠날 때 마음속으로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배우’ 차승원씨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친구 아내가 닮았다고 말을 해줘 차승원씨가 출연한 ‘신라의 달밤’을 봤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여러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다”고 답했다.
미국 야구와 한국 야구를 두루 경험한 그는 “한국도 조금씩 스포츠 마케팅이 발전하는 것 같다. 잠실 야구장에 버거킹이 들어간다든가 이종범 선수로 인해 관중 수가 증가하는 것 등은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처럼 되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O'Malley-Lasorda by iccsports
다저스 아시아부는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부는 피터 오말리 구단주(위 사진 오른쪽) 시절에 시작된 부서입니다. 오말리 전 구단주는 중,남미와 아시아 야구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셨죠. 오말리씨는 한국에서 KBO가 시작할때도 6개 구단 구단주들을 미국으로 초대해 메이저리그 구단을 시찰을 하게 하는 등 한국 야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전통을 이어 받아 현재의 다저스 아시아 부서도 LA 커뮤니티 업무뿐만 아니라 해외 야구 지원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야구 발전에 기여하는 부서가 될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 문화를 모두 충분히 경험한 정씨는 “한국 사람인 내가 한국에 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는데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는 얼마나 어려움이 많겠는가. 그런 어려움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특히 내가 야구 선수였기 때문에 미국으로 진출하는 선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미국으로 진출하려는 한국 선수라면 다저스 구단을 한번쯤 생각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여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저는 Free Agent입니다”라고 답변한 정씨는 “착하고, 똑똑한 여자면 좋겠습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좋아하는 여성상’을 소개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정윤현 씨는 이후 다저스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팀장직을 맡았고 지난 2008년 1월15일 롯데 구단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 특별보좌역을 맡게 돼 한국에서 활동하게 됐다. 아래 사진을 보니 한국에서도 미국처럼 '커티스'로 알려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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