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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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9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1) 이명섭 사건 10주년(상)
2009/11/02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2)-이명섭 사건 10주년(하)
2009/11/09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3)-노스리지 대지진
(4) LA 폭동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1992년 12월25일 성탄절 아침이었다. 집앞에 배달된 LA 타임스를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이런저런 기사를 읽다가 오피니언 섹션(Co-Op)을 열어보았다. ‘A Holiday ‘Thank You’ to Our many Heroic Neighbors’라는 제목의 신문 사설을 읽게 되었다. ‘세밑에 우리의 영웅적인 이웃들에게 감사를’이란 제목이었다.
나는 ‘올 한 해도 많은 사람이 남을 돕기 위해 열심히 일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이 사설을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사설의 후반부에 내 이름이 있어 너무나 깜짝 놀랐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양현승 목사, 한미구호봉사기구가 설립하도록 도운 인물로 이 단체는 LA 폭동 피해자들과 시민에게 음식, 셸터 정보 제공, 카운셀링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흑인, 라틴계 등을 포함해 총 1,000가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신문에 소개된 한미구호봉사기구(The Korean American Food and Shelter Service. 후에 Shalom Community Center로 개명)는 1992년 LA 폭동으로 인해 창설한 비영리 봉사단체다. 이 단체는 LA 폭동 피해자뿐만 아니라 도시 빈민층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 한미구호봉사기구는 단순히 LA 폭동 피해자를 돕는 일만 하는 게 아니었다. 청소년, 한국인, 타 인종 이민자들이 함께 봉사하며 폭동 피해자를 돕고 동시에 LA 재건 운동(Rebuild Up L.A.)에 참여했다.
LA 폭동은 미국 역사에서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불행 속에 LA 재건 운동 바람이 일어나 어찌 보면 어려움 중에 미국 사회를 돌아보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폭동의 현장을 한 아마추어 비디오그라퍼가 촬영했습니다.
미 주류 언론에서 기자로 일했던 이경원 씨가 폭동의 교훈에 대해 강론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욕설이 나오지만 아픔의 표현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992년 4월29일 경찰에 의해 집단 구타를 당한 흑인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배심원 평결이 경찰의 무죄로 나오자 발발한 LA 폭동으로 LA 코리아타운과 인근이 불바다가 됐다. 4월29일에 발생해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을 ‘사이구’로 부르기도 한다. 미 주류 사회 TV 방송에서는 일반 시민이 슈퍼마켓의 유리창을 깨고 물건을 강탈하는 장면이 나왔고 그 피해자들 중 다수가 한인 이민자였다.
한인 업체는 250여 개 점포가 불에 타고 일부 점포 주인들은 무장 상태에서 물건을 강탈하는 시민을 막으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추후 나온 발표를 보면 당시 한인 업체 2,800곳이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체 피해 업소는 1만여 개였다. LA 폭동으로 LA 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1천만 달러에 달했고 58명이 사망하고 2,383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인 피해액은 무려 4억 달러로 추산됐다.
대혼란의 상황이었다. 미국 적십자사 자원봉사자였던 나는 이 사건이 터지자마자 윌셔에 있는 적십자사로 달려갔다. 적십자사에서 우리는 피해자들이 당장 먹을 음식에 대해 의논했다. 대부분 제공할 수 있는 게 인스턴트 식품이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도움이 덜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적십자사 직원들에게 대부분 피해자가 한국인이니 그들이 먹을 수 있는 한국 음식이나 재료를 구입해서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인이 원하는 것은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나는 이 음식들을 구입해서 구제 사업을 벌였던 두 곳(장소제공: 라디오 코리아와 동양선교교회) 중 한 곳으로 보냈다. 당시 라디오 코리아(대표 이장희)에는 ‘사랑의 장터’라는 구제 센터가 있었고 동양선교교회에는 단체들이 연합한 폭동피해자 구제 센터가 있었다. 동양선교교회로 구제품을 전달하러 갔는데 총영사관에서 대책 회의가 있으니 미국적십자사 대표가 참석해주면 좋겠다는 전갈이 왔다. 자원봉사자였지만 미 적십자사 양해하에 봉사자 대표 자격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나는 대책 위원회에서 일을 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폭동 대책 위원회 및 두 곳의 다른 봉사단체들과 연관돼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두 곳으로 나뉘어진 구제 센터의 일원화가 급선무임을 파악 했다. 구제품을 받으러 미 주류 사회와 접촉해서 대화를 할 때마다 미국인들은 “왜 구제 센터가 두 곳이 있느냐”고 매번 질문을 했다. 일원화하지 않으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양쪽 센터 담당자에게 호소를 했다. 양측도 일원화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양 센터를 한미구호봉사기구가 중심이 되어서 통일하기로 했다. 원래는 The Korean American Food and Shelter Service라는 영문 이름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미주 한국일보의 박봉현 기자가 한미구호봉사기구라는 이름을 붙여, 그것이 한국어 공식 명칭이 됐다. 지금 생각해도 박봉현 기자가 이름을 기가 막히게 잘 지어준 것 같다.
6월24일 미국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한미구호봉사기구라는 비영리단체 중심으로 일원화하고 동양선교교회 주차장에 모 회사에서 리스해준 트레일러식 모빌 홈을 세워놓고 본격적인 구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많은 단체가 지원을 해줬다. 제록스 회사에서는 복사기, 모 종이회사에서 복사용 종이, 전화회사에서는 무료 전화 및 사무용 시설을 가설해줬다. 봄철인 4월29일에 폭동이 났지만 피해자를 돕고 구호품을 나눠주고 LA 재건을 위한 운동은 햇볕이 따가운 여름이 되어가면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동양선교교회 주차장에 놓고 사무실로 썼던 트레일러에 냉방 시설이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꽤 오랜 기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을 한 후에 뒤늦게 에어컨을 설치하긴 했지만 나와 봉사자들은 더위를 먹는 등 고생이 심했다.
트레일러 안은 한여름에 냉방 시설이 없고 창문이 없는 버스 안이라고 생각하면 상상이 될 것이다. 나는 함께 일하는 분들이 더위에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소리없는 시위를 하고 싶었다. 백악관에서 특사들을 보냈고 우리에게 연락을 했다. 그들이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나는 일부러 그들에게 트레일러 안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너무 더웠는지 그들은 에어컨이 있는 자동차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봉사자들과 도움을 받으러 온 폭동피해자들이 매일 이 더위에 갇혀진 곳에서 숨 막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정부관계자들은 봉사자들의 노동 조건을 거론했다. 하지만 남을 돕는 데 노동 조건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충분한 지원이었기에 나는 그런 식으로 시위를 했던 것이다. 나중에 냉방 시설도 생겼지만 당시 무더위 속에서 찜통 안에서 일하면서 폭동으로 인해서 졸지에 피해자가 된 분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백악관 관계자들이 폭동 구제 센터에 오게 된 사연이 있다. LA 다운타운에 있는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폭동 관련 회의가 있었다. 백악관 관계자는 “법률 담당자, 농무부 담당자, 각부서 담당자들이. 폭동 피해에 관계되는 사람들과 직접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끝까지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백악관 책임자가 나를 향해 “양 목사님도 발언을 좀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즉답했다. “상황을 파악하고 싶으면 동양선교교회에 와서 폭동 피해자들이 구제품을 받는 등 고통하는 현장을 직접 보세요.” 그렇게 해서 백악관 관계자가 현장에 나오게 됐던 것이다.
이 일로 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대로 LA 인근의 한 대학에서 그를 만났다. 1993년 7월로 기억되는데 대통령 초청에서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폭동 피해자들의 시련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을 위해 계속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더니 대통령은 “폭동피해자들에게 계속적인 관심을 갖고 이들의 재건을 지켜보겠다”고 답했다.
나는 LA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한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LA 폭동의 원인이 됐던 흑인들의 가난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흑인들을 돕는 프로그램인 LA 르네상스 프로그램에 자문 이사 초청을 받고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흑인들도 피해자였다. 그들도 생필품과 기금 융자 등이 필요했다. LA 르네상스 프로그램은 바로 어려움에 있는 흑인을 돕는 프로그램이었다.
단순히 돕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흑 갈등, 인종 간의 갈등이 이 기회에 완화되기를 나는 바랐다. 흑인교회(First
그러던 중에 LA 재건을 위해 좀 더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전 교단차원에서 참여하고자 미국 연합 감리교회(
1992년 10월
교단 차원에서 돕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얼마 후 나는 샬롬 존 미니스트리의 사무총장(Executive Director)으로서 풀타임(Full Time)으로 일할 수 있도록 임명됐다. 그 후 연합 감리교 본부에서는 풀타임으로 일할 사람 2명을 한미구호봉사기구로 보냈다. 그리고 한미구호봉사기구의 명칭을 Shalom Community Center로 변경했다.
마침 동양선교교회에서도 10개월 동안 주차장을 사용했고 피해 복구에 대한 충분한 도움을 줬다고 판단해 장소를 이동해줄 것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한미구호봉사기구는 1993년 3월 미국연합감리교회의 기금으로 L:A 한인타운의 크렌셔 길에 건물을 빌려 구제센터를 새롭게 이전하게 됐다. 이 센터는 활발한 활동으로 NBC TV등 방송과 1993년 4월19일자 타임 매거진에 소개되기도 했다.
양현승 목사는 미국 주류 방송의 출연 요청을 받고 한인의 권익 그리고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여러 방송 출연 비디오를 편집해서 소개한다.
한미구호봉사기구의 활동과 LA 재건 캠페인을 위해 나는 미 주류 방송사의 출연 요청을 받아들였다. LA 재건에 대한 토론이 각 방송사에서 있었다. 나는 NBC-TV, CBS-TV 등에 출연해 한인들의 권익과 LA 재건을 위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 2세였던 앤젤라 오 변호사도 한인의 권익을 방송에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추후에 안 사실이지만 오 변호사는 내가 미 주류 사회의 도움을 제대로 받게 하기 위해 한 리더십 프로그램에 8개월 동안 참여할 수 있도록 나를 추천했다 한다. 실제 나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해 미국 주류 사회 시스템을 배우게 됐다.
바쁜 와중에도 주류 언론이 초청하면 뛰어갔더니 주류 사회에서 이것저것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LA 재건 캠페인 영상에 내 발언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 주류 언론 방송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폭동 복구 현장에서 남을 위해 구제를 하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LA 재건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한다. 서로를 존중할 때다(Rebuild LA in people’s heart. Respect each other)”라고 답변했다. 그런데 그 인터뷰 내용을 본 한 영상 제작 관계자가 어느 날 봉사 현장을 찾아와 이 말을 공익 광고 제작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사용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허가서에 서명을 했는데 이것이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홍보 영상으로 쓰이게 됐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인권운동을 했던 제임스 로슨(James Lawson) 목사님이 진행하는 전국으로 방영되는 TV 토크쇼가 있었는데 나는 이 방송에 출연해 “다음 세대를 위해 이번 세대가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의 메시지는 '우리의 삶은 가족을 포함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삶'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미구호봉사기구를 운영하면서 일부러 많은 청소년을 동원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 추천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으로 봉사를 원하는 청소년들을 이 일에 참여시켰다. 나는 역사의 현장을 아이들이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장을 봐야 마음에 감동이 있기 때문에 한인 청소년뿐만 아니라 흑인들도 봉사하도록 영입했다. 나는 한인 폭동 피해자를 도우면서 동시에 타인종 시민과 연결점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동시에 한인 폭동 피해자를 돕기 위해 주류 사회와 접촉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했기에 벅차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미구호봉사기구 건물은 많은 단체의 수련회 장소로도 사용됐다. 각 교회 중고등부와 전국여성목회자 총회 참석자자가 샬롬 커뮤니티 센터에 와서 수련회를 가졌고 캘스테이트 노스리지 교수들도 같은 장소에서 우리의 봉사활동을 배우며 수련회를 열었다.
이런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한인 사회의 봉사기관, 교회, 언론사, 독지가, 전문인, 자원봉사자들의 숨은 노고 덕분이었다. 한두 명의 노력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미 전국에서 엄청난 온정이 쏟아져 나는 힘든 나날을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다. 1992년 7월 초순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새벽에 위스콘신주에서 71피트짜리 대형 트럭이 도착했는데 여기에는 기저귀가 가득 실려 있었다. 또한 교회 학교 어린아이들이 가져온 각종 캔 음식, 한 교회 여신도들이 밤을 세워 만든 김치 200병, 불교 신자들이 절에서 모은 음식을 교회 주차장의 구호 센터로 가져온 일, 냉동 소고기 4,000파운드를 기증한 유대인 미국인, 두부와 쌀 등을 구입해서 가져온 일본인 교회, LA 재건위원회의 밴 기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손길은 폭동 피해자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필요했던 구호품들이 뜻밖에 도착하면 스님들도 “양 목사님이 기도하셨군요!”라고 감탄할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자원 봉사 일을 하다가 골절상을 입어 3개월 이상 투병했던 봉사자도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구호 식품을 받았는데 변변한 냉동 시설이 없어서 쓰라린 마음으로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도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땀을 흘리며 썩은 채소를 혼자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나는 다음 성경 말씀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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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년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년 부활절에 미군 GI로 한국 DMZ근무 중 미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년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년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년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을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한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때 샬롬(평화)을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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