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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1)-이명섭 사건 10주년(상)

by 밝은터_NJT 200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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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능력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오늘 날짜는 미국 기준으로 2009년 10월29일입니다. 1999년 10월29일은 일본 대기업 미국 지사에서 근무했던 이명섭 씨가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 날입니다. 당시 자살사건으로 미국 사회는 물론 한국과 일본도 사건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대기업, 한국인과 일본인, 인종차별 이슈 등으로 인해 많은 이가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명섭 사건 10주년을 맞이해 '양현승 커넥티드' 첫 번째 내용으로 소개합니다.

 <이명섭 사건 관련 미주 중앙일보 보도 내용>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 (인터뉴스) 편집

1. 이명섭 사건(I)

미국 연방 판사인 마거릿 모로가 나에게 말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내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억울함을 당했던 고 이명섭 씨와 죽은 남편과 아빠 없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준꼬 씨 그리고 그의 자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1999 1029. 일본의 화물운송 대기업인 니폰 익스프레스의 미주지사에서 근무했던 이명섭 씨(당시 38세)가 회사 내 인종차별을 비관하고 자살을 해 미국 내 한인 사회는 물론이고 미국 주류 사회 그리고 한국에서도 큰 이슈가 된 바 있다.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터키에 있었다. 터키에 지진 성금을 전달하러  갔고 LA에서 이명섭 씨 사건이 터졌는지도 모른 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영국을 거쳐
LA 공항에 도착했더니 LA 한인회 관계자가 많은 분이 양 목사님을 기다린다지금 바로 한인회로 가야 한다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그분과 함께 한인회에 도착했다.  한인 사회 리더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이명섭 씨 사건에 대해 간략한 이야기를 들었던 나에게 단체장들은
양 목사님이 대책 위원장직을 맡아줘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일단 신문이라도 좀 보자고 했고 이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를 읽어보았다. 신문 보도 내용에는 이명섭 씨가 지난 1029일 오전 11시 가족들이 외출한 사이 토런스에 있는 자신의 집 차고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쓰여 있었다.

일본인 직장 상사의 인종 차별적인 발언에 시달리다가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책 위원장직을 사양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LA한인 사회 리더들의 꼭 맡아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한인을 돕는 것은 나의 운명적인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명섭 자살 사건 관련 미주 한국일보 1면 기사>


나는 먼저 미망인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명섭 씨의 일본인 아내인 준꼬(당시 36) 씨를 만났다.  일본인 아내를 둔 한인 남성이 일본계 회사에서 상사의 인종차별 발언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나는 이 사건에 복잡한 한일역사와 한일감정이 얽혀 있음을 직감했다.


이명섭 씨의 아내 준꼬 씨에게는 갓난아기와 초등학생 딸이 있었다
. 준꼬 씨를 만나 당시 이명섭 씨와 준꼬 씨가 다녔던 교회(남가주 조이풀 처치)의 담임목사님(김모세)으로부터 그동안의 상황을 듣게 됐다. 이명섭 씨가 담겨둔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미스터 XXX라는 일본인 동료가) 한국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이빨을 닦지 않아서 김치나 마늘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함. 나는 매우 당황했고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들도 한국식당을 가서 한국음식을 먹으면서도 나에게 업무 도중에 불러서 그런 코멘트를 하는 것은 상당한 한국인에 대한 모독이며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이지매라고 생각한다.”


김모세 목사는 또한 이명섭 씨가 일본인 상사로부터
너는 전화를 받지 말아라. 오리지날 일본 발음이 아니잖냐?” “조센진. 한국인들은 야만인들이다라는 모욕적인 말을 자주 들었다고 증언했다.

나는 준꼬 씨를 위로하면서 대책위원장으로서 니폰 익스프레스와 진상을 파악하고 투쟁을 하겠다고 약속하고 한 편으로 장례식 준비를 돕기로 했다.

<이명섭 사건은 당시 미 주류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했다. 그림은 LA 타임스가 이명섭 씨 장례식 후 니폰 익스프레스 사 앞에서 가진 평화적 시위를 보도한 내용이다.>


이명섭 씨 장례식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된 나는  한인 사회에서 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호응도가 높아서 금세 11,200달러의 성금이 모였다.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액수였다. 나는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이 장례식에서는 일본인 목사님이 기도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목사님(루이 미즈키)을 찾았고 그분이 이웃과 평화로운 관계 만들기(Peace-making)에 관심이 있었던 목사님이라 대책위원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일본인 목사님이 장례 예배에서 기도하는 것에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었다
. 문제가 된 민족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연관성을 갖고 계속 대화해야 앙금이 풀린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이 사건 대책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일본인들을 배척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즈키 목사는 장례식에서 이 같은 차별이 미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며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나는 니폰 익스프레스 관계자들과 먼저 악수를 청하려고 노력했다
. 그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더라도 당사자와 어떤 형태로든 대화창구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폰 익스프레스 관계자들은 나의 악수 요청에 경직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악수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나의 행동이  미망인 준꼬 씨에 상처를 줄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니폰 익스프레스 관계자들을 배척하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주 한국일보 보도 내용>


남은 것은 재판이었다
. 재판에서 이명섭 씨 가족이 생활을 할 수 있는 보상금을 받도록 하고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재판을 위한 조정작업이 시작됐을 때 나는 이명섭 씨 측 참관인으로 참여했다. 재판 조정작업을 할 때 니폰 익스프레스 측과 우리 측은 서로 다른 방에 있었다.

우리 측 변호사는 지금은 미국 LA카운티 수피리어 법원 판사가 된 한인 이민 3세 하워드 함(Howard Halm. 왼쪽 사진) 씨였다.  조정을 위한 만남에서 나는 이 사건을 맡은 마거릿 모로 판사에게 내가 한 말씀 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모로 판사는 나에게 발언할 기회를 줬다. 발언을 하는데 나는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명섭씨가 인종 차별 당했던 상황,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호소하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이명섭 씨의 상관이 치사한 내용(입에서 나는 김치 냄새)으로 그를 괴롭힌 일, 미망인과 두 아이가 살아갈 날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그때 모로 판사가 손수건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울면서 이 재판이 우리 쪽에 유리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희망을 감지했다
. 판사가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려도 내버려둘 수 있었던 상황인데 그가 손수건을 건넨다는 것은 우리의 아픔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속]


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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