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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6)-적십자사 봉사 47년

by 밝은터_NJT 2009.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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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6) 적십자사 봉사 47년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광주제일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특별 활동을 하도록 했다. 내심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싶었던 나는 그 꿈을 미뤄야 했다. 가정 재정 형편이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보이스카우트 유니폼을 구입할 비용과 활동비를 지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지만 나는 금세 마음을 고쳐 먹고 특별 활동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게 무엇일까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단체가 바로 적십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청소년 적십자사 활동이었다.


대한
  적십자사의 청소년 적십자(Junior Red Cross, 그 당시에 약자로 JRC라고 불렀음)) 16세 때 가입한 나는 47년이 지난 지금(2009)까지도 적십자사의 봉사자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 꾸준히 적십자와 연관지어 활동했던 나는 미국으로 온 후에도 36년 동안 봉사자로서 일을 했다 

미 적십자사에서 활동했던 초기의 모습이다. 양 목사는 "미국인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항상 마음은 모국 한국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대한적십자사와 연계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미국에 오자마자 혈액원에서 봉사를 시작하고 재난 구제 활동, 청소년 활동 등을 통해 미 적십자사와의 관계를 이어갔다. 적십자사는 나에게 봉사의 훈련장을 충분히 제공했다. 나는 화제 현장에 가서 돕는 활동, 청소년 적십자를 돕는 활동, 재난 현장에서 구제 봉사, 군인가족 돕기 및 교육자료 개발 참여 등을 통해 사회 봉사가 무엇인지 철저히 체험했다

 

미국 적십자사에는 일년 365일 구체적으로 꾸준히 도울 일이 산재해 있다. 몇 년 전 미국적십자사에서 ‘올해의 봉사자 상’을 준다기에 한참 거절하다가 “다른 봉사자들을 격려하게되니 그 상을 받는 것도 봉사다”라는 말을 몇 번 듣고 받아들였다. 봉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했던 연설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주식 투자가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인터넷을 열어서 주식 동향을 보듯이 저는 커뮤니티에 오늘 도울 일이 무엇인지 살폈습니다. 실은 저에게 봉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바로 봉사상  입니다.” 적십자사는 그만큼 풍부한 봉사 기회 및 정보가 있는 곳이었다. 봉사 정신을 갖고 안테나를 조금만 높이면 봉사할 기회는 얼마든지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큰 사고가 있을 때마다 적십자사와 봉사한 것도 있지만 적십자사 자체에서 실시하는 국내외 봉사에 참여하면서 나는 사회 봉사가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배웠다
. 미국적십자사 친선대사로서 스페인어로 번역된 AIDS 프로그램을 아르헨티나 적십자사에 제공한 것은 내가 했던 일 중 생각나는 적십자 봉사 활동 중 하나였다. 그곳 적십자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개발할 재정과 인적자원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이 프로그램을 아르헨티나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추진해서 열매를 맺었다. 1985년에 내가 중심이 되어서 우리말로 번역한 지진대비에 관한 꽤 두꺼운 분량의 책자가 나왔는데 그것이 1994년의 노스리지 지진 때에 유용하게 쓰일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대한적십자사와 연계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마이크를 들고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양현승 목사. 그는 "두 번째 교육을 위한 방문 때는 출발직전에 사고로 허벅지에 큰 화상을 입은 채 서울로 향했다"고 했다. "교육을 시키는 종일 얼음찜질을 하면서 강행했다"고.


미국 적십자사는 다양성을 중요시 하기에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적십자사 및 봉사기관과 연계해 꾸준한  활동도 벌이는데 역시 나는 한국인인지라 대한적십자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두 차례  대한적십자사 직원과 봉사자를 위해 한국으로 나가서 교육 훈련을 했고 미국에 그들을 두 차례 초청해서 훈련을 받도록 했다.

1997년도에 북한 적십자사에 식량 후원금 16만 달러를 보낸 일도 보람됐다. 중국 적십자사가 미국에 왔을 때 그들의 활동을 돕는 등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봉사를 하면서 다양한 인종
, 문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적십자사 내부에서 나의 이미지는 ‘다양성을 강조하는 봉사자’와 ‘청소년 교육자’로 굳어졌다. 미 적십자사 직원이나 봉사자들은 청소년과 관계된 일이면 나에게 질문을 하곤 했는데 이유는 회의 때마다 내가 청소년 봉사활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나는 청소년들이 적십자사 봉사자로 참여해 어릴 때부터 남을 돕는 일에 익숙해져서 생활화 되어야 한다고 믿어 청소년 적십자 모임을 조직하도록 계속 후원했다. 

이렇게 다양성 활동을 하다보니 미 적십자사 전국본부에서는 나를 미국적십자사 전국 다양성 위원회 11인 위원으로 선출해 3년 동안 활동하게 했다. 이 선출직을 위해서 아시아 태평양 법률센터의 스튜어트 쿼 변호사와  L.A. 타임스의 카니 강 기자가 추천서를 써줬다. 이것 역시 커넥티드(connected)의 또 다른 열매였다. 나는 또 미국 적십자사 LA 지사에 이사로서 6년 동안 봉사하면서 수석 부이사장으로서도 봉사했다.


그러한 직책이 내 사적인 이익과는 관계가 없었다
. 나는 여전히 적십자사의 직원이 아니라 자원봉사자였고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자비량 선교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출직인 전국다양성위원과 지역본부의 이사 자리는 내가 이웃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했다. 현장 봉사만 하고 의사결정 과정과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책 같은 것에 영향을 줄 수 없는데 봉사와 관리를 동시에 하면 더 다양하게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현장에서 일하는 봉사도 봉사이고 경영 및 관리에 참여하는 것도 봉사라고 생각했다
. 내 개인의 명예 때문이라면 전국적 단위의 참여와 지역 이사회의 책임을 맡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서 고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봉사와 이웃돕기로 가득찼던 것 같다
. 이는 청소년 시절 때 부터 계속된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아니 소명인것이었다. 나는 목회자로서 교회에서 봉사했지만 적십자사 봉사자로서 사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것 같다. 적십자사는 내가 사회로 ‘점프 인(jump in)’을 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준 귀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봉사를 통해 만지고 껴안고 듣고 울고 웃을 수있었던 현장의 체험을 함께 전하면서 더욱 삶과 연결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을 데리고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적십자사 125주년 기념 전국총회에 참석한 양현승 위원이 기념촬영을 했다. 이 '125주년 기념 배너'는 양현승 전국다양성위원회 위원이 제안해 채택된 바 있다.


적십자사 봉사를 하면서 배운 중요한 것 하나가 있는데 이는 봉사가 삶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해야지 봉사를 하나의 행사 참여로 “봉사하러 간다”고 하면 진정한 봉사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봉사활동 나갔을 때만 행하는 ‘일회용 봉사’라고 생각하면 기쁨과 희열을 맛보지 못하게 된다.

꼭 적십자사와 연관된 일이 아니더라도 종교단체나 다른 비영리 자선단체와 연계해서 봉사를 할 때
  삶이 봉사가 되게 하면 봉사하는 사람의 삶 자체가 넉넉해지며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왜 기쁠까? 이런 마음으로 봉사를 하면 너와 나의 벽이 없어지고 서로가 연결이 된다. 결국 세상 일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인데 벽이 허물어지고 일이 기쁠 때 거기서 보람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는 봉사뿐만 아니라 직장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것과 희열을 느끼면서 나오는 열심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남다른 희열이 있다보니 봉사 현장에서도 소통이 잘되고 감사함을 자주 경험하게 됐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허리케인 리타로 현장 봉사를 나갔을 때 처음 보는 사람들과 소통이 이뤄질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이런 마음으로 봉사에 참여하다보니 적십자사 직원과 봉사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미 적십자사 LA 지사 사무실에 가면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나를 파트너로 생각한다. 직원이든 봉사자이든 얼마나 열심히 도와주는지 그런 것에 나는 감격한다. 그들은 나의 일을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돕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더니 내가 사무실에 출현(?)하면 일하던 동료가 각자의 방에서 나와 반갑게  나를 맞아주는데 그런 상황이 바로 사람 사는 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이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받는 최상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과 관계 없을 때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물었기 때문이다
. 할 일이 있을 때만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연락해서 잘 지내는지 묻고 관심을 보이면  친해진다. 이는 네트워킹의 방법이라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에서 나오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적십자사에서 활동하면서 한 가지 더 터득한 게 있다
. 대화를 할 때 내가 관심있는 분야를 자주 강조하고 평소에 그 분야에서 봉사하면서 말할 때 그들이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의 경우 다양성(diversity)과 청소년 교육(youth education)을 항상 강조했는데 내가 그 분야에 대해 자주 말하고 관심을 갖다보니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앞서 소개했지만 나는 적십자사 내에서 청소년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 나는 회의가 있을 때마다 “25년 전까지만 해도 적십자 청소년 활동이 활발했는데 LA 지사의 경우 활발하지 못해 그 무엇보다도 청소년 적십자 활동을 지원하고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조로 인해 LA 지역 세 곳의 학교에 적십자사 청소년 클럽(Red Cross Youth)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워싱턴 D.C.에서 열린 적십자사의 125주년 전국총회에 청소년 대의원들을 보내도록 주선하고 함께 참여했는데 청소년들에게 좋은 경험이 됐다.


큰 행사가 있으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 그래서 적십자사 직원들은 다양성을 염두에 둔 내가 대표로 기도해주기를 기대했다. 나는 항상 다양성을 염두에 둔 기도를 했는데 한 번은 눈 뜨고 다 같이 다정한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기도를 하자고 했더니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만졌던 것 같다. 그 기도도 다양성을 염두에 둔 기도였다. 우리는 눈 뜨고 기도하며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북한의 한 축제에서 북한 여성과 춤을 추고 있는 양현승 목사. "미국 적십자사의 일원으로서 사명을 갖고"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축제에 참여했던 그는 "북한 동포와 금세 친해져 그 분이 자신의 아내와 함께 춤을 추라고 권유해서 남북 화합의 춤을 추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양성 운동에는 우리 민족인 북한도 포함된다. 지금은 오랜 세월 분단돼 거리감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적십자사 활동을 위해 그곳 적십자사 대표들과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1991년 미 적십자사에서 북한 적십자사 대표를 평양에서 만나도록 주선해 나는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했는데 북측에서 바닷가에 조개를 먹으러 가자고 초청해  친구처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보이스카우트 유니폼을 구입하지 못해 택했던 적십자사는 지난
47년 동안 양현승을 만든 중요한 장이다. 나는 2년 전 미국적십자사에서 달아준 45년 봉사 배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47년 동안 적을 두고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저 기쁨으로 일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50년 되는 해에 적십자사 봉사 활동을 그만 두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으로는 60년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앞으로 봉사할 때도 ‘도움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Help Cant Wait)’라는 정신으로 할 것이다. 적십자사에서 나에게 연락이 올 때는 일단 그 일은 긴급을 요하는 일인줄 알기에 봉사하겠다고 하면서 나의 다른 일을 재조정해온 것이 꾸준히 47년을 봉사한 비결 이다. 적어도 미국적십자사 안에서 나는 ‘아니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Never Say No)’으로 통한다. 왜냐하면 그 단체는 급한 일을 돕는 곳이기 때문이다.


질 발렌티 전 이사장과 함께


미국적십자사에서 함께 봉사했던 동료 중에는 직원으로 제씨 톰슨 씨, 짐 헤이그우드 씨 및 H.T.와 이사장을 맡았던 봉사자 질 발렌티 씨가 생각난다. 질 발렌티씨는 그 어느 누구보다 시간을 많이 내어 봉사활동을 했다. 그와 많은 대화를 하면서 적십자사의 앞날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그는 봉사자가 무엇인지 경영관리직이 무엇인지를 아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분이다. 사무실을 방문하면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며 내 일을 자신들의 일처럼 도왔던 적십자사 직원 및 봉사자들은 영원한 나의 형제요 자매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앙일보에서 모금한 아이티 지진 성금 1차분을 전달받는 모습. 2010년 2월9일 약 15만 달러가 적십자에 전달됐다. 미주 중앙일보 2010년 2월10일자 종합 2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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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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