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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5)-허리케인 카트리나/리타

by 밝은터_NJT 2009.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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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5) 허리케인 카트리나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혼잡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 다리 아래쪽에는 물이 꽉 찬 상태였고 강물은 다리를 넘어설 기세였다. 내가 운전하며 가던 길의 반대편에는 피난민들이 운전하던 자동차의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내가 가던 뱡향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반대편에 있던 피난민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위험한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을까?” 내가 운전하던 길 반대쪽은 정체 현상에 극심했지만 내가 가던 길쪽은 뻥뚫려 있었다. 마음을 졸이며 운전하면서 택사스의 재해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세 가족이 피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 가족이 한 집에 모였다. 시장하던 터에 그분들이 수프를 끓여줬는데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한 분이 나에게 시장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는데 나는 재해 현장에 오면 낙타와 같은 배가 됩니다라고 답변하며 음식을 사양했다. 이전에 먹은 것으로 저장을 했기에 괜찮다는 답변이었다. 피난을 가지 못했던 그분들은 여전히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수프를 대접했다. 위로를 하러 갔다가 위로를 받는 순간이었다.  봉사를 할 때 이런 경험을 하면 참으로 보람이 된다.




2005 823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미시시피 등의 지역으로 몰아쳤다. 그리고 얼마 후인 같은 해 917일 허리케인 리타가 루이지애나, 텍사스, 남플로리다, 아칸소 등을 강타했다. 내가 물이 넘치는 다리를 건넜던 시점은 미국적십자사 봉사자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구제 현장에 갔다가 허리케인 리타가 몰아쳤던 상황이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많은 것을 잃었던 미국 남부 지역 주민들은 리타를 만나면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무려 1,836명이 사망했고 705명이 실종했다. 이로 인한 손실액은 약 812억 달러로 추정됐다. 그런 상황에서 허리케인 리타는 너무나 잔인한 자연재해였다. 허리케인 리타로 역시 120명이 사망했고 손실액은 1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역사상 가장 극심한 자연재해 1, 9위에 올랐던 두 허리케인이 짧은 간격으로 비슷한 지역에 연속으로 몰아쳤던 것이다.

나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몰아쳤을 때 루이지애나주의 베이튼 루지(Baton Rouge)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피난을 가고 있을 때 그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터라 기분이 묘했다. 비행편이 끊겨서 애틀란타에서  베이튼 루지로 운전해 들어가면서 나는 피난도 가지 못하는 허리케인 피해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을 어떻게해서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내가 무사히 그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침과 점심 식사도 거른 채 '미친 듯이(?)' 재해현장에 다녔던 양현승 목사는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주의 재해 현장을 찾아 현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또한 도움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전국 본부에 보고했다. 사진은 양 목사가 미시시피주 빌락시(Biloxi)를 찾아 지붕이 내려앉은 집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는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나는 베이튼 루지 지역에 머물면서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데 미국 적십자사 본부에서 허리케인 리타가 발생했으니 텍사스주 휴스턴 쪽으로 가라는 전갈이 왔다. 휴스턴에도 피난을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즉각 이동을 시작한 나는 밤 늦게서야 휴스턴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미 적십자사에서 예약해 놓은 호텔에 도착했는데 재해 지역에서는 사전 예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재해 지역에서는 호텔 측이 먼저 온 사람을 받아줘야 한다고 했다. 내가 잘 방은 없었다. 나는  밤 늦게 휴스턴 지역 재해 센터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늦은 밤이라 본부에는 당직을 서는 스태프가 한 명 있었다. 내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슬리핑 백(침낭)을 주면서 사무실 바닥에서 자라고 했다.

재해 현장에서는 슬리핑 백만 있으면 바닥이든 어디든 군소리하지 않고 잠을 청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바닥에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지역에 있는 한인 공관의 부총영사가 내가 휴스턴 지역에 왔다는 말을 듣고 연락을 했다. 나의 사정을 들은 그는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가라고 청했다.  뜻하지 않게 그 댁에 가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부총영사님의 아내되시는 분의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다음날 아침 맛 있는 음식을 채려주셔서 든든하게 먹고  부총영사 부부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재해 현장에 나갈 수 있었다. 나의 봉사는 항상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함께 시작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일어나던 날을 나는 기억한다. 미국 적십사자 LA 지사장이 중앙일보 미주본사 간부들과 점심을 나누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즉각적으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는 것에 대한 대화를 시작했다.

곧 나는 재해 현장에 봉사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미 적십자사 LA 본부로 가서 봉사를 위한 재훈련을 받았다. 40년 이상 적십자사 봉사자로 일했기에 이미 훈련을 받은 바 있지만 이런 재해가 발생하면 짧은 재교육을 받는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참여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재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훈련을 받는다. 나는 재해를 당한 가족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 (긴급 구조 긴급 신청 등)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동시에 나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지진 성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한인 사회는 이미 9.11 테러 때 2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은 바 있는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자연재해인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성금에도 미국 시민으로서 자진해서 참여해서 5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됐다.


"동료 모두가 아름다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순간순간 정다운 말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사적인 감정이 나오면 안 된다. 동료는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해 인간의 한계성을 느끼면서도 그런 모습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수년 후 수십 년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면 좋지 않은 기억보다는  '우리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양현승 목사)


미국 적십자사는 재해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위해 데빗카드를 가족들에게 발급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동시에 몰려드는 바람에 원할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피해자들은 줄에 줄을 섰고, 무료 전화를 시도했지만 전화 자체가 먹통이 되기 일쑤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자들은 피해자체도 고통스럽지만 도움을 청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까 분노심마저 생겼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피해 지역의 우리 동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베이튼 루지에 있는 한인 셸터에 연락을 취했다. 그들은 더욱 더 구제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있음을 알게 됐다.  미 적십자사 전국 다양성 위원회 위원이었던 나는 베이튼 루지에 있는 한인들을 돕기로 약속했다. 미 적십자사 총재 매리 에반스(Mary Evans)는 재해 지역에 파견할 커뮤니티 및 의뢰인 옹호자(Community and client advocate)들을 위한 훈련을 위해서 워싱턴 DC로 오라는 요청을 했다. 나는 곧바로 밤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 DC 전국 본부로 갔다.

나는 훈련을 받으면서 베이튼 루지에 있는 피해자와의 약속이 계속 생각났다. 훈련을 다 받고 출발하면 재해 현장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허리케인으로 항로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이튼 루지 지역에 연락을 했더니 항로가 다 막혔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지역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전을 짠 것은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가서 애틀랜타에서 차편으로 베이튼 루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베이튼 루지 현장의 봉사자들과 그렇게 하기로 협의가 됐다.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미국 적십자사 총재에게 긴급성을 재차 호소했다. 본부에서도 그 필요성을 알고 재빨리 항공편을 주선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나는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두 봉사자가 나를 데리러 애틀랜타 공항으로 나왔다. 자동차를 타고 베이튼 루지에 도착하니 어둑한 밤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를 거르고 재해 피해자들의 호소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 11시가 다 되자 오히려 피해자들이 내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회의를 잠시 중단하자고 했다. 식사 시간도 거르고 그들의 분노의 소리를 듣자 그들은 분노모드에서 점점 협조 모드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휴점상태였던 대형 수퍼마켓을 빌려 자리를 빌려 설치된 재해 센터로 향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나는 재해 센터를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봉사자와 적십자사 직원들이 일을 하는데도 손이 부족하다는 것을 줄을 선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분노로 가득했던 그들도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재해현장에는 크게 베이튼 루지, 휴스턴, 몽고메리 3개 지역에 적십자사 재난대책본부가 있다. 베이튼 루지본부에 있던 자원봉사자들과 직원들은 한인 이재민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이재민을 정성껏 돕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위 사진에서 왼쪽 두 번째 자원봉사자(리 메이슨)는 "많은 이재민을 돕기 위해서는 약 4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더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메이슨의 부인은 이번 재난과 관련해 전국 본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근무 중이라고 했다.  배너의 내용은 '우리는 아시아 태평양 출신의 이재민들을 잘 돕겠다'는 그들의 다짐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3개주 7개 도시를 2개월 이상  다니면서 미 적십자사 봉사를 강행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은 피해자들과의 만남에서 일단은 그들의 어려움과 분노의 소리를 들어주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장에 도착하면 첫날 밤은 재해자들과 셸터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데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말을 다 들어준 후에 나는 그들에게 긴급 재해 현장에서는 불평하거나 푸념을 할 시간이 없고 그 시간에 지혜를 모아서 어떻게 뭘 할 것인가를 찾아내자고 피해자들과  봉사자들을 격려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타 인종들에게도 통했다. 휴스턴에 있는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안 커뮤니티를 내가 책임져 주기를 미국적십자사전국본부로 부터 요청을 받고 그들을 만났는데 .적십자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쌓여 있었다. 그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오랜 시간 그들이 가진 불만과 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적십자사의 고위직 직원이 아닌 봉사자인 것을 알고 태도가 확 바뀌었다. 그들은 내가 당연히 적십자사 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미국적십자사 전국다양성 위원회의 위원인 봉사자 입니다라고 말하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후 그들은 내 말을 소화하는 게 달라졌다. 그때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은 신뢰가 유지되면 소통이 된다는 것이었다. 

재해 피해자들과 계속 대화를 하다보니 최대한 그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됐다. 나는 피해자 작성 폼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해를 당한 것도 서러운데 3장짜리 긴 작성 폼을 작성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나는 적십자사 본부에 짧은 폼을 만들어서 피해자들의 마음 고생을 덜어주자고 제안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적십자사에서는 그 짧은 폼을 다른 재해 피해 복구 센터로 보내주기를 원했다. 문제는 전기가 끊기고 팩스가 고장나고 전화선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는 봉사자들에게 세 가지를 요청했다. 먼저, 전기 발전기를 찾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물에 젖지 않은 팩스와. 전화선이 살아 있는 지역을 찾아달라고 했다. 우리는 전화선이 있는 곳에 팩스와 발전기를 들고 가서 1장짜리 폼을 다른 복구 센터에 보낼 수 있었다. 함께 힘을 합하니 일이 진행됐다. 우리가 이렇게 힘을 합하지 않았더라면 하루 이틀이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그 이튿날부터 아시안들을 위한 센터에 베트남, 중국, 필리핀계 등 아시안계 피해자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중국 총영사관에서 나온 외교관을 만나고 있었는데 긴급 전화가 왔다. 그 복구 센터에 적십자 요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리 도착한 적십자사 요원이 겁이 나서 소요가 일어날 것 같아 적십자사 자켓을 벗고 방에 들어와서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나는 중국 외교관과의 대화를 멈추고 센터로 향했다.  줄을 선 아시아계 피해자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이렇게 뙤얕볕 뙤약볕에 서있지 말고 번호표를 나눠줄 테니 정해진 시간에 오세요.” 이후 소요 사태 같은 게 일어날 리 없었다.



존 머레이 부부. 허리케인 카트리아의 이재민이면서 이번 기회에 필자의 요청으로 미국적십자사 자원봉사자가 된 김창생씨가 같은 이재민인 존 머레이 부부의 신청 서류 작성을 도왔다. 베이튼 루지 한인 셸터에 마련된 적십자사 '패밀리 서비스 센터'에는 한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뎅씨, 흑인 머레이씨 등 타인종들도 도움을 받았고 이는 의미있는 일이었다.


매일 봉사가 끝나면 봉사들과 스태프들은  전국 컨퍼런스 콜을 통해 그날 있었던 일을 나눴다. 컨퍼런스 콜을 할 때마다 나는 “우리는 왜 이 현장에 나와 있습니까? 재난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의 심정으로 일해야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저 봉사하러 왔다고 생각하면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매일 이 내용을 반복해서 말했다.

약 두 달 간의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 반가운 편지가 한 장 도착해 있었다. 미국 적십자사 총재가 친필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당신이 우리 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는 메시지였다..적십자사 LA 이사장인 Jill Valenti여사는 이 친필편지를 보고는 웃으면서 액자에 넣어서 잘 보관하라고 했다. 그는 이어 적십자사 총재가 네가 하는 일이 마음에 와 닿았기에 비서를 시키지 않고 바쁜 중에 직접 편지로 써서 보낸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내가 했던 일을 내가 혼자 했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함께 격려하고 격려 받으면서 해냈던 일이다. 내가 격려하면 움직였던 그들의 마음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과 연결해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사회 봉사를 할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희열이다. 나는 총재의 편지 대신 그 희열을 가슴 속의 액자에 넣어서 간직하고 있다.  [계속]


당시 라디오 코리아와의 인터뷰 내용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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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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