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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7)-미국 정치 참여

by 밝은터_NJT 2009.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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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7) 미국 정치에 참여하다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현재 나의 사회봉사 활동은 과거의 경험이 축적된 산물이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 과거에 발생했던 일도 그보다 더 과거의 경험이 쌓여서 탄생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미국적십자사 봉사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정치활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다양한 참여 경험이 훗날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나는 지난
1979 7월 미국 민주당 한인 총회(Korean American Democratic Caucus:KADC)의 사무총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서 일하면서 나는 미국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한인 사회의 권익을 지키는 데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 참여를 통해 목소리를 내야 권익이 보장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한인)끼리 아무리 좋은 의견을 내봤자 미국 정치에 반영되지 않았음을 알았고 주류 사회 정치권으로 들어가서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이 귀기울이는 척이라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마침 미국  민주당 한인 총회의 회장이었던 장성길 씨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장성길씨는 LA한인회장으로 활동을 했고 나는 이사로 참여했다. L.A.한인회가 기금이 부족하게되자 이사이면서 무급 사무총장으로서 자원봉사도 했다.

내가 미국 주류사회의 직장인 미국보이스카우트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미국적십자사에서 남가주 혈액본부의 운영이사 그리고 L:A한인회 이사로 봉사하면서 보여줬던 활동력과 헌신적인 태도를 보고서 나를 사무총장으로 영입했던 것 같다. 민주당 한인 총회는 1979년 장성길, 이천용,김수안 씨 등의 주도로 조직됐고 나는 사무총장이 됐다. 우리는 지미 카터 대선 후보의 당선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백악관을 방문하고 카터의 측근을 LA 코리아타운에 초청해 모금파티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1979 12월 민주당한인총회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아들인 칩 카터를 초청해 카터 후보 지지를 천명함과 동시에 선거기금 모금 파티를 했다.
 

칩 카터 초청 기금 모금 파티 관련 미주 한인 언론의 기사.


우리는 이 밖에 미 대통령 선거 정책에 관한 토론회, 시민권자 투표 훈련, 매월 정기회의 및 임시회의를 가지면서 미국 정계로 발을 내디뎠다. 나의 민주당 활동은 카터 대통령 대선 이후에도 계속됐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 선거 당시 투표를 위한 전화 캠페인을 L.A.지역 민주당 대선본부에서 벌여 대통령 당선에 작은 기여를 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밤 LA 인근 토랜스시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는데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서 그 행사에 참여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민주당 한인총회(한미 민주당협회. KADC) 1세대가 흘린 땀으로 2세대 젊은이들에게까지 이어져 2009년 현재 민주당 내에서도 믿을만한 협회로 성장했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처럼 2세들을 영입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은 이 총회의 회장으로 출마할 자격을 얻게 돼 당선 가능성이 높았지만 미래를 위해 2세에게 회장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다.

당시 리처드 최 씨가 추천했던 2세 한인과 장성길 씨가 추천했던 내가 부회장 선거를 해 내가 부회장으로 뽑혔고 나는 회장 출마 자격이 있었지만 2세에게 양보해 이후 민주당 한인협회는 2세들이 이끌어가는 분위기가 될 수 있었다. 당시 함께 열심히 민주당 총회 일에 관여했던 한인 1.5세 리처드 최 씨는 한국어, 영어가 모두 능통한 분으로 꾸준히 민주당 활동을 하고있고 지금도 오랜만에 만나면 서로 반갑게 맞는다.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 독려 전화를 걸고 있는 양현승 목사. 당시 양 목사는 민주당 한인 협회 부회장이었다. 미주 한국일보의 기사


역시 한미민주당협회의 회장을 역임했던 강석희 씨(2009년 현재 캘리포니아주 얼바인시 시장)도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몇 년 전에는 미국적십자사 전국 총회에 이산가족 결의문을 내면서 캘리포니아주의 커미셔너이자 한미민주당협회의 회장 자격으로 결의문을 지지하는 추천서를 보내준 바 있다.

정치 활동을 하면서 아쉬움이 있었다면 참여할 때 조금이라도 정치력이 생기면 이것을 짧은 안목으로 자기자신의 유익으로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끼어드는 점이었다
. 그런 사람들이 참여하면 꼭 문제가 발생했다. 정치에 참여할 때는 사적인 이해관계 도모도 좋으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정책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한인이라면 한인 사회의 권익도 우선으로 생각할줄도 알아야 한다.

어쨌든 민주당한인총회에 참여하면서 나는 미국 정치를 배울 수 있었다. L.A.지역 민주당 주요 회의에는 꾸준히 참석해서 그들의 정치를 배울 수 있었고 나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인 밀집지역을 지역구로 둔 마이클 루스 하원의원의 추천으로 캘리포니아주 민주당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내가 공화당 대신 민주당을 택한 이유는 이 당이 민초(grassroot)에 대한 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배려를 하는 정당이라 하더라도 이해 당사자가 참여해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됨을 알았다. 단순히 참여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참여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어야만 한다. 또 한 가지 배운 것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나 민원이 있을 때는 지역 하원의원 사무실을 통해서 해결하는 방법이다. 하원의원이나 상원의원도 중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돕는 보좌관과 유대를 지켜나가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와 연계해서 이런 훈련을 받은 덕에 훗날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사과를 권고하는 미국하원결의안(HR121) 통과를 위해서 하원의원들을 만나 호소를 할 때도 과거 경험이 유용하게 쓰였다. 나는 정치인들과 소통을 할 때는 좋은 제안을 하면서 통계 자료를 제시하곤 했다. , 정치인들과의 유대관계를 통해 그들과 대화를 꾸준히 하면서 내가 당사자의 심정으로 호소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선거구민의 서명을 발로 뛰면서 받아서 투표권자의 숫자를 보여주는 청원서 등을 제시할 때 일이 효과적으로 진행됨을 알게 됐다.



그리고 모르고 함부로 떠들다가는 큰 코 다치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한 공부를 해야 함을 배웠다.

한 예로 북한 인권 문제를 놓고 워싱턴 DC 상원의 공청회에 갔을 때의 일인데, 과거 민주당 한인 총회에 소속했을 때의 경험들이 상원의원과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질문에 대비해  준비를 함으로써 적절한 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영어로 말을 할 때 유창하게 말을 늘어놓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실제 현장에서 주효했다. 이후 목사가 되어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현장에 있는 정치인들과 유대를 맺고 그들의 정치 활동을 기독교계와 연결하여 돕기도 했다. 민주당원인 정동수 씨가 하원의원 후보로 나왔을 때 투표날 아침에 후보와 스태프들이 모여서 내가 기도를  했는데 이런 참여는 너무나 소중했다. 나는 정동수 후보가 한인사회에서 본의 아닌 인식 공격을 받을 때 라디오 코리아와의 생방송 인터뷰를 통해 정동수 후보의 참된 면을 이야기해줄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민주당원 이면서도 한인의 권익을 위해서 공화당 연방하원이던 김창준 씨가 재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에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독교계와 연결하여 기도회로 재선 선거운동에 불을 붙였다. 아울러 김창준 의원의 저서 “나는 보수다’의 출판기념회를 성공적으로 추진해 재선에서 당선되도록 도왔던 것은 당을 떠난 한인 권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지원 사격도 과거 정치 참여 경험이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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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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