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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9)-사우디 근무와 클레어몬트신대원 입학

by 밝은터_NJT 2009.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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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9) 사우디 근무와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입학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미국 보이스카우트 본부에 근무하면서 나는 저녁 시간을 내서 신학 공부를 하기로 했다. 나는 미국 내 한인 운영 신학교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내가 신학을 할 경우 재정적인 어려움을 걱정해 했던 말을 마음에 두던 중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수양관에서 신학생 수련회가 열렸다.

수련회를 하는 과정에 아내가 말했던 재정문제가 더욱더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신학 공부를 하면서 가족을 보살피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CCC 수양관에 올라가기 전에 봤던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형 건설 장비를 판매하는 미국 회사(GTE)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할 수 있는 세일즈 엔지니어를 특채한다는 기사를 본 생각이 문득 났다. 채용 관계 컨설턴트이자 인터뷰 담당자인 모 대학의 경영학 교수(한국인으로 허 박사님으로 기억한다.)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채용되려면 MBA를 공부했어야하고 최소 3년 이상 이 분야에서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MBA 학위도 없고 이 분야에서 일한 경험도 없기에 다른 경력을 설명했다. 나는 보이스카우트에서 일했던 경험, 사람을 대했던 경험, 세일즈라는 것은 사람과 관계를 잘 맺으면서 이 회사의 제품을 잘 알고 잘 팔고 구입자를 기분좋게 하면 되는 것이니 내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경력을 상세히 써서 보낼테니까 허 교수님께 한번 심사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허 교수님은 “그럼 한 번 써서 보내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이러한 시도가 “굉장히 흥미롭다”고 말했다.

나는 보이스카우트 경험 등을 사례로 써서 교수님께 보냈다. 그 내용을 읽어본 교수님은 “이 정도면 MBA과정을 한 것으로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이스카우트 활동 3년을 했으니까 세일즈 3년 경험이 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이 유연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1차 서류 심사에서 통과를 했던 것이다. MBA도 아니고 이 분야 3년 경력자도 아닌 내가 서류 심사에 합격한 자체가 기적과도 같았다.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한 사람 9인이 뉴욕에 모였다. 9명 중 3명이 고용되는 상황이었다. GTE라는 미국 대형 건축 장비 판매회사에서 비행기표를 보내줬다. 그런데 비행기표를 보니 밤 비행기를 타고 아침에 회사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숙박비를 아끼고자 하는 회사의 방침이 엿보였다. 나는 그렇게 가면 피곤해서 제대로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합격을 하면 돈을 받을 것으로 믿고 하루 전날 뉴욕에 도착하는 비행기표를 구입했다.

그리고 호텔 예약을 했다. 전날 도착해서 여유있게 회사에 가야 제대로 인터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과감한 행동을 했다. 나는 인터뷰를 하는 여러 명 중 한 분인 허 교수님이 묶고 계신 호텔을 알아냈고 일부러 그 호텔에 예약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전화로만 통화를 했기에 그의 얼굴을 알 수 없어서 호텔 로비에서 한국분으로 보이면 인사를 건냈다. 그렇게 그 교수님을 찾는데 3-4시간 쯤 지났을 때 마침내 그분을 만났다. 그 교수님은 나를 보자 껄껄껄 웃었다. 나의 적극성에 놀라는 눈치였다.

편히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GTE 본사를 찾아갔다. 다른 후보생을 보니 모두 밤 비행기를 타고 와서 지친 표정이었다. 호텔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나만 쌩쌩했다. 나는 뉴욕으로 가기 전 아내에게 GTE사로 전보를 하나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여보 그리고 아빠. 우리가 떨어져 있지만 지금 당신의 인터뷰를 생각하고 있고, 외국에 나가 있더라도 우리는 괜찮아요!”라는 내용의 영문 전보를 부탁했다. 나는 도착한 그 전보를 인터뷰를 하는 분들(인터뷰어)에게 보여줬다.

나는 또한 서류용(일명007) 가방 안을 잘 정리해서 심사위원이 볼 수 있도록 돌려 놓고서 설명을 해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한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그 회사 명함을 만들어서 갔다. 명함에는 ‘세일즈 엔지니어 후보자’라고 씌어있었다. 나는 인터뷰에서 “합격될 줄 알고 어제 낮 비행기로 편하게 왔고 호텔에서 편히 잤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용을 인터콤으로 듣고 있던 이 회사 회장이 인터뷰 도중에 자기 방으로 나를 불러올렸다. 순간 나는 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 방으로 간 나에게 이 회사 회장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이 일은 어차피 장사인데 이익을 내는 것이니까, 나는 회사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회장의 두 번째 걱정은 3개월마다 비용을 포함한 유급휴가를 주지만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게 괜찮은 지였다. 나는 회장에게 가족이 보내준 전보를 보여주며 문제 없다고 했다. 회장실에 나오는 나의 모습을 본 함께 인터뷰를 했던 사람들은  “당신은 됐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내가 사전에 숙제를 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20여 년 만에 만난 광주일고 동기동창 백우섭(사진 오른쪽)은 물론이고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명동에 있던 모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민영호(왼쪽)씨를 사우디에서 만났다. 이들을 이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GTE에 고용이 된 후 일정한 훈련을 받은 후 나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갔다. 사우디에 도착했는데 비가 잘 오지않는 건조한 나라가 촉촉한 비로 나를 반겨주었다. 나의 염려되는 우울한 생각을  비가 씻겨주면서  ‘사우디가 나를 반가이  맞는다’고 자신감이 생겼다. 세일즈를 하기 위해 나는 곧바로 건설 현장에 나갔다. 나는 현장을 나가면 마을에서 한국계 회사 직원들의 숙소에서 그들과 함께 잠을 잤다. 그들에게 일부러 신세를 졌다. 한번은 고산지역이라 호흡하기 힘든 지역이었는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그들과 친해졌다. 나는 처음부터 장비를 팔지 않고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했다. 또 그들에게 달력을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부담없이 줄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하면 좋아한다. 친해진 후에 사무실이 제다라는 곳에 있었는데 그때 출장오면 한 번 들르라고 명함을 줬다. 나는 그들과 인간관계를 맺고, 선물 가게에 가서 가족 선물을 사주곤 했다.

사우디에서 신기루를 자주 경험했다. 모래 바람을 맞으면,  차가 모래에 거의 묻히다시피했다. 그럴 때 잘못 움직이면 차가 자꾸 빠져 버린다. 위험할 수도 있다. 모래가 차를 덮으면 숨이 막혔다.

위험한 곳이었지만 한창 개발 중인 나라였고 한국 회사도 많이 들어가서 세일즈는 생각대로 잘됐다. 가족들이 재정적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0년대 모 미국TV회사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 반달 임금으로 200여 달러를 벌었으니까 월 1만 달러 안팎의 수입은 엄청난 것이었다.

제다에서 세일즈를 했지만 나는 다른 지역에서도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다. 타 지역에서도 연락이 와서 판매 매출이 늘어났다. 다른 세일즈 엔지니어들이 장비를 팔고 외상이 있을 때 제너럴 매니져가 나에게 수금을 맡겼다. 나는 외상을 받기 위해 상대 회사의 담당 직원들이 회사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입장을 살려주면서 다른 장비를 경쟁 회사보다 훨씬 나은 가격으로 판매를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회사에서 외상을 갚을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했다. 내가 과거 살았던 스타일로 세일즈를 했는데 그게 통했다.

이렇게 잘 풀렸지만 마음 구석에 신학 공부를 하다가 사우디에 왔다는 게 마음 어딘 가를 건드렸다. 그런 마음이 지속됐다. 어느 날 세일즈를 나갔다가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신학교에 복귀해야 한다는 소명감이 나를 짓눌렀었다. 미국에 있던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아내에게 “여보, 나 본래 하려던 신학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좀 더 일해주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내 입장을 생각해 알았다고 답했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네덜란드를 통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나는 기왕 공부를 새로 시작할 바에는 미국인 운영 신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걸어온 길을 볼 때는 연합감리교 신학교를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 연락해 카운셀러를 만났다.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학교에서는 토플 점수를 요구했다. 나는 1년 동안 USC(남가주대) 도서실에 매일 도시락 2개를  싸가지고 가서 공부했다. 토플 시험을 볼 때마다 그 신학교에서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1년을 공부하고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을 찾아가서 입학 의지를 말했더니 비학위과정(Non-Degree)으로 조건부 입학을 하라고 권유했다. 학교 측에서는 한 학기를 열심히 하면 학위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한 학기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에서 대학원 영어 코스를 택하라고 했다. 나는 영어 공부를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여자 교수님이 열심히 하는 나를 좋게 보았고 그는 내가 비학위과정에서 학위 과정으로 옮길 때 강력한 추천서를 써줬다. 나는 대학원 영어 과정에서 A, 다른 과목에서 B+를 받았다. 왠지 B+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교수님 집을 찾아가서 기회를 더 달라고 강청하기로 했다. 나는 교수님 집 밖에서 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3-4시간을 기다렸는데 교수님은 밤 11시쯤에 귀가했다. 교수님이 “왠일이냐”고 물어서 나는 “기회를 더 달라”고 말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교수님은 나의 열정에 감복해 다시 기회를 줬다. 결국 더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학위과정으로 옮기는 심사를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지정한 교수와 인터뷰가 있었다. 인터뷰를 했던 교수님은 “신학교에 오기 전에 뭐했냐”고 물었는데 나는. “보이스카우 본부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그 교수님 아들이 보이스카우트여서 우리는 보이스카우트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 교수님이 좋은 추천서를 써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종 결정을 위한 위원회가 열리는 날 학생처장이 나에게 결과를 전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파트 2층에서 살던 나는 햇볕이 내려쪼이는 창가에 앉아서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학생처장 매리 케이 목사님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렸다. “현승, 당신은 학위과정 학생이 됐어요!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재학시절 공부 따라가기에 바빠서 사진 찍을 틈도 거의 없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책을 계단에 올려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함께 사진을 찍은 조건갑 목사(오른쪽)는 당시 윌셔연합감리교회의 교육목사였고 나는 교육전도사였기에 학교에서 만나면 서로 반갑게 맞아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의 신학 공부는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전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신학 공부를 한게 다 였고 아무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었기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의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좋은 친구를 만났다. 반에서 나를 도울 사람이 누군가 지켜보고 찾던 중 데이튼이라는 순박한 친구를 만나게 됐다. 나는 자주 그의 노트를 빌려서 봤다. 착한 그는 자신의 노트를 빌려줬다. 그의 노트는 그러나 필기체로 써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착했는지 내가 “좀 알아볼 수 있게 써달라”고 했더니 나중에는 인쇄체로 또박또박 알아보기 쉽게 노트해서 나에게 넘겨줬다.

데이튼과 나는 약속 그룹(Covenant Group)’을 만들어 다른 신학생들과 나눔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 그룹이 학생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소그룹이 되자 전체 학생회에서 나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대표로 전국 연합감리교 신학교 전체 회의에 보내게 됐다. 오하이오주에서 열렸던 전국 연합감리교 신학교 전체 회의에 가서 나는 커버넌트 그룹에 대해 발표를 했고 그것이 소그룹의 롤모델로 채택됐다. 이 컨퍼런스에서 나는 신앙적이면서도 민주적으로 진행하는 회의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속했던 커버넌트 그룹은 남자 2, 여자 2명으로 구성됐고 필리핀계, 한국계, 백인계,히스패닉계의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돼 캠퍼스에서도 잘 알려졌다.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는 교수님들의 도움과 사랑도 많이 받았다.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댄 로드(Dan Rhode)는 나의 지도교수님 이셨는데 어느 날 에세이 형식의 시험을 보게 됐다. 로드 교수님은 “현승, 너는 영어 문법을 신경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써라! 캘리포니아에는 유전이 있잖아. 그것을 끌어 올리듯이 너의 심장 속 깊이 묻혀있는 바로 그 생각을 끌어올려 쓰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이 힘이 되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답안지에 빽빽히 적었다. 그 교수님은 나중에 나를 불러 답안지를 보면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면서 구술 내용을 포함해서 채점을 해주셨다.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나의 다른 은사는 어윈 트로터(Irwin Trotter) 설교학 교수님이다. 그분은 내가 본래 목사 후보로 추천을 받았던 윌셔 연합감리교회의 담임 목사님 이셨다. 그때 인연이 맺어졌다. 그는 이후 신학교 교수가 되어 나를 보살펴 주셨다. 이 은사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신학교 공부도 목사 안수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가족은 어윈 트로터 교수와 클레어몬트 교정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2009 11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도서실에 잠깐 들렸을 때 잭 쿠건(Jack Coogan) 교수님이 운전를 하고 가시다가  교수님도 나도 서로  손을 번쩍 들어 반갑게 맞았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쿠건 교수님은 나에게 종교와 예술(Religion and Art)에 대한 심성과 창조적인 혜안을 길러주신 분이다. 내가 극단L.A.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교수님께 연극 프로그램 순서지(부분적으로 영어)를 보내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이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이렇게 내가 신학도가 된 것은 1980 518일 발발한 광주 민중항쟁 때문이다. 신학도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치인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5.18 항쟁이 내 인생을 뒤집어놓았다.

미국 정치에 참여해서 정치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나는 5.18을 머나먼 미국에서 겪으면서 모든 게 뒤집혀 버렸다. 1980 5.18은 나에게 “왜,왜 왜? 어떻게, 어떻게 해야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신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한계의 벽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말로만 들었던 그 하나님이 나에게도 연결되는 하나님이기를 소망하고 신학교에서 나의 열정을 다 쏟았던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동료 신학생 중에 타성화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힘이 빠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이렇게 신학을 해야 할까” 하는 회의가 드는 순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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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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