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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11)-미군에 입대하게 된 사연

by 밝은터_NJT 2010.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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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1) 미군에 입대하게 된 사연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내가 DMZ에서 세례를 받게 된 사연이 있다. 나는 미국적십자사 점거 사건 2년 전인 1978년 한국 비무장지대(DMZ)에서 미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께서 내 동생들이 미국에서 공부하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취셔서 나는 어떻게 하면 동생들을 미국에서 공부시킬까 고민하다가 시민권을 빨리 받을 수 있는 미군이 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한국에서 군복무를 마친 바 있는 나는 미군에 지원하게 됐다.

미군이었을 때 동료들과 기념촬영. 빨간색 원안이 31세 미군 양현승 목사.


나이
30세가 넘어서 들어가게 된 군대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사병 훈련 중에 체력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4종목에서 모두 합격해야 정식 군인이 될 수 있었다. .철봉타기, 윗몸 일으키기, 푸시업, 그리고 1마일 달리기에서 합격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4종목 모두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특히 1마일은 처음에는 12분이 나왔다. 도저히 합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병 훈련 한 달을 받고 시험에서 통과를 못하니까 중대장이 나를 불렀다. 중대장은 나에게 “너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선택이 하나 있다. 특별 훈련소에 가서 체력훈련을 받은 후에 이쪽으로 다시 오든가, 집으로 돌아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특별훈련소의 책임 장교에게  31세의 나이에 내가 미군에 온 것은 시민권을 받아 가족을 초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별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을 동안에 시민권 수속을 해야 할 일이 있으 면 이민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더니 그는 특별 외출을 승인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특별 훈련소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잠잘 때까지 완전군장을 하고 하루 종일 운동을 하며 체력을 단련했다. 훈련 조교는 “미군 세금을 축내겠느냐 열심히 하겠냐”고 독려하며 내가 몸만들기에 매진하도록 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마일( 1600m) 달리기에서 합격했다. 이전에 1마일을 12분에 달렸던 나는 특별 훈련소에서 630초에 끊었다. 3주 동안 열심히 운동하니까 그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연일 뜨겁던 조지아주의 날씨도 내가 측은했던지 도와주었던 것이다. 1마일 시험을 보던 날 뙤약볕 같은 여름 날에 비가 촉촉히 내렸다. 비가 와서 좋았고 나는 딸 이름인 하나를 부르면서 열심히 달릴 수 있었다. “하나야, 아빠 뛴다!” 이렇게 스스로 응원을 했다.

남은 2종목도 패스를 했는데 마의 종목인 철봉 타기가 남았다. 이상하게 철봉에 매달려 전진하다보면. 아래로 뚝 떨어졌다. 훈련관은 “앞으로 전진한다고 생각하며 가야 하는데 너는 떨어질까봐 걱정한다”고 조언을 했다. 그 말을 믿고 나는 전진하는 데 집중했다. 놀랍게도 전진을 잘하게 되었다. 독립기념일 연휴가 있어서 다른 훈련병들은 집으로 단기휴가를 갔는데, 나는 처량하게 훈련소에 남아 있었고 철봉 타기 시험을 보게 되었다. 철봉. 시험을 보는데 훈련관이 “이미 숫자가 넘었으니 안 해도 된다”고 말했고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치 씨름 선수가 천하장사가 된 순간처럼. 모래 주머니를 잡아서 공중으로 던졌다. 훈련관이 “너 기물파괴를 해서 감옥에 가고 싶냐”고 농담하면서 함께 기뻐해줬다. 나는 당장 짐을 챙겨 본 부대로 복귀했다.

나와 함께 입소했던 사람들은 기초 훈련이 거의 끝나는 시기였다. 결국 나는 다음 기수로 넘어갔고 새롭게 훈련을 받게 되었다. 새 기수에서 나는 고참처럼 여겨졋고 훈련병 중 리더인 근무병으로 지냈다. 훈련병 중 리더가 되니까 특전이 주어졌다. 보통 한 방에 10명씩 자는데 나는 2명이 자는 방에서 잘 수 있었다.

미군체력장훈련이 2009년에도 유효하다. 2009년에 양현승 목사의 집에서 보여준 '거뜬한 철봉 솜씨'.


본래 내가 받은 병과는 법정 서기였다
. 당시 미군에서는 자신의 병과를 선택하는 혜택을 받으면 첫 번째 훈련 후에 갈 수 있는 근무지를 선택할 권한을 잃어버린다. 나는 한국으로 가고 싶었기에 한국 가는 것을 우선으로 했더니, 병과를 포기하라고 해서 받은 것이 엉뚱하게도 전화 가설 통신병(36K)이라는 병과였다.

통신병이 되기 위한 훈련은 그 어느 사병 훈련보다 고됐다. 조지아주에서 훈련을 받는데 막사에서 훈련장까지 가는 동안 일부러 모래사장을 걸어서 전화 가설에 필요한 장비를 양쪽에 메고 모래 위를 걷는 훈련을 했다. 뜨거운 여름 날씨는 나에게 큰 어려움을 줬다. 하지만 열심히 한 결과 전봇대의 꼭대기에 철모를 올려놓기 위해서 끝까지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 시험을 내가 제일 먼저 통과했다. 나이 많은 내가 이 시험을 통과하자 다른 어린 훈련병들이 그것에 자극이 되어 그 훈련장에서 전원이 시험에 통과했다. 전 훈련원이 나를 헹가레 치면서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 생생하다.

1978년 3월20일 DMZ에서 세례를 받았던 내가 12년 후에 같은 장소에서 밀러 군목과 함께 기도한 내용은 미육군 신문에 상세히 소개됐다. 사진 왼쪽은 내가 세례를 받는 장면. 오른쪽은 내가 밀러 군목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다.


나는 바람대로 한국에 나갔고 DMZ에서 미군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때 조 밀러 군목/대위를 만나게 됐다. 사연은 이랬다. 훈련을 나갔을 때 아내가 내 안부를 묻는 전화를 우리 부대에 했다. 그 상담자로 밀러 군목이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얼마 후 내가 야전 훈련을 받고 있는데 헬리콥터가 내리면서 밀러 군목이 나를 찾았다. 밀러 군목은 “네 아내가 네 걱정을 하는데 어떤지 알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그 일이 인연이 돼 나는 밀러 군목과 친해졌고 이후 사순절 기간에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1978 1월 중 한 주말에  나는 임진각 너머에 있는 DMZ에서 외출을 나가지 못한 채 부대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잔잔한 눈이 내렸다. 눈송이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때 자연에 대한 어떤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 바로 우리 부대  건너편에 있는 북한 병사들이 생각났다.

그 눈이 내리는 순간에 이와 같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함은 예수가 이 땅에 와서 가능케 됐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교회를 들락날락하면서 귀동냥으로 얻어 들었던 말이다.

그 순간 예수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을 갖고 사순절이 되었을 때 군목을 만나 그 경험을 말하니까 밀러 군목은 “네 마음에 예수를 만난 것 같다”며 세례 받을 것을 권면했다. 그게 첫 번째 상담 내용이었다. 이후 군목실을 다른 때보다 더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럴 즈음에 DMZ에 있는 부대에 미 육군 전체 군목 책임자인 군종감인 준장이 방문했다. 밀러 군목과 나는 부활절에 세례 받는 것에 대해 상의했다. 부활절 세례를 상의하고 난 뒤에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내 마음 속에 분단된 조국의 한 복판에서 세례를 받고 싶은 생각이 나서 군목에게 말했더니, “그러면 북한 병사가 있는, 군사분계선 바로 앞인 공동경비구역(JSA)안쪽의 철책 앞 초소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그곳을 들어가려면 군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부활절 전날 밀러 군목이 나에게 “부활절 예배 직 후에 병기실에 가서 방탄복을 입고 권총을 수령해서 차고 완전무장을 하고 들어가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부활절 예배를 끝내고 밀러 군목이 지프차를 직접 운전해 우리는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들어갔다. 초소에 있는 병사들을 위해서 밀러 군목은 다시 한번  예배를 드린 후에 군사분계선 최북단에서 세례를 하겠다고 하고 초소에서 근무하던 소위에게 입회를 하라고 했다. 밀러 군목이 나에게 “소망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이 DMZ Zero Point  Zone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군사분계선이 없어지고 남북이  통일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DMZ에서 조 밀러 군목/대위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는 장면


북한 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미 육군 수통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세례를 받았다. 밀러 군목은 이 사실을 육군 본부에  보고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밀러 군목 자신이 소속된 연합감리교 본부에도 이 내용을 보고를 했다고 한다.

미군으로 있으면서 한국 카추사들과 한 부대에서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면서 친해졌다. 또 미군과 사귀는 한인 여자 친구들이 임진각을 못 넘어오면 나를 통해 미군 남자 친구들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한국인 여자 친구가 영어가 부족하면 내가 중간에서 통역 역할을 맡기도 했다.

군대 안 막사는 침대가 2층 침대로 되어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때로는 인종이 다른 미군들 사이에 문제도 발생했다. 그럴 때 나는 서로 친구가 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면 같이 근무했던 사병들은 나보다 10살 이상 많았기에 그들을 동생처럼 다둑거리며 조언도 해주었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이국 땅에 있는 어려움을 호소하면 아픈 마음을 들어주기도 했다.

19세의 어린 흑인 병사의 경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있어서 군대에 오게 됐다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부모와 자식은 나간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아버지가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네가 오늘이라도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한국에서 인쇄된 카드를 건네줬더니 좋아했다. 쓸 말이 없어서 인지  망설이기에 내가 카드 내용을 불러줬더니 그 흑인 병사는 씩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카드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또 웨스트포인트를 갖 졸업한 소위가 왔을 때 마치 어설픈 사관생처럼 보였는데 나는 그를 한국군 그리고 미국군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내 자신도 고달팠던 순간이 있었다. 새벽이면 중대원들과 함께 임진각 입구 까지 구보를 하면서 서울에서는 모두 잘 자고 있을텐데 나는 DMZ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있었다. 당시 내 아내는 군에서 가족수당이 지급되어서 한국에 나와 살고 있었는데 한번은 임진각이 차단돼 외출을 할 수 없었다. 한국인이기에  민통선에 들어오는 동네버스를 타고 몰래 임진각을 넘어서 마음을 조이며 가족을 보러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딸의 돌잔치에 겨우 참여할 수 있었다.

     "딸의 돌잔치. 나는 이 뽀뽀를 백만불짜리 뽀뽀라고 생각한다."


군 제대를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밀러 군목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 미국적십자사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나는 한국 적십자사에 일이 있어서 나가는 길에 밀러 군목을 찾아뵈었다. 이전에는 밀러 대위였는데 당시 밀러 중령으로 승진해서 다시 한국에 나와서 미 2사단 책임 군목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동두천에 있는 밀러 군목의 숙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미군을 위한 영어 예배와 카추사를 위한 우리말 예배에 내가 설교를 했다. 밀러 군목은 2사단에 있는 미 군목들을 소집해 서 그들과  함께 DMZ로 가서 내가 세례를 받았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자리를 그들에게 보여줬다.

그때 세례를 받은 곳을 방문한 후 군사정전회담장을 방문하려고 하는데 어떤 일이 발생하여 출입이 금지되었기에 그곳을 못 들어가게 됐다. 나는 웃으면서 “나는 곧 가까운 장래에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미국 장로교와 연합감리교  관계자들이 함께 북한의 조그련(조선 그리스도 연맹)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게되었고 개성에 내려갔을 때 군사정전회담장에 가게 되었는데 밀러 군목/중령에게 말한 내용이 1년 후에 실현되는 작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공동경비구역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군사분계선에서 '조국은 하나'임을 외치고 있는 임수경 학생과 문규현 신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양현승 목사는 1991년 방문시 판문점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나는 미국 군대의 경험을 통해 조직 내에서 어떻게 리더가 되고 참여자가 어떻게 협력을 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장교와 사병의 관계, 사병과 사병의 관계, 상하 관계, 동료 관계를 통해 배운 것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조직도 배웠다. 군대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역시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배웠다. 내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군대에 갔지만 나는 ‘미군은 나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미군이 건강식을 제공해줄 것이고 아프면 의사도 만나게 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당시 고된 훈련을 통과했기에 훗날 다른 일을 할 때 고된 일에 대해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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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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