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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12)-월드비전과 연극 활동

by 밝은터_NJT 2010.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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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2) 월드비전과 연극 활동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내 인생에서 월드비전과의 10년 인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월드비전과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연관을 갖고 일할 기회가 있었다.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민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설립된 기독교 계열의 국제 구호 개발 기구다. 월드비전의 목표는 "모든 사람, 특히 어린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일하는 것(working for the well being of all people, especially children)."인데 6대륙에 지부가 있는 기독교 구호재단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 중 하나다 2007년 예산이 2억 6천만 달러였으니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1월20일 미주 한국일보 기사. 당시에는 월드비전이 선명회로 불렸다.


내가 월드비전에서 봉사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0년대에 임동선, 차현회, 황성수 목사님이 한국 월드비전(당시 명칭 선명회)의 요청으로 북미주 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사무총장으로 봉사해주길  부탁을 했다. 당시 임동선 목사님이 회장이었다.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1993년 말에 태동의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사랑의 빵 운동’을 첫 사업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데니스 한씨를 유급직원으로 채용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미 전국적으로 사랑의 빵 저금통을 배포했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를 때 미국 월드비전에서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미국에서 일하기에 운영할 수 없다는 지적을 했다.

이미 수개월 동안 활동을 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우리는 처음에는 당황했다. 임동선 목사외 차현회 목사가 나에게 “미국 월드비전과 이와 관련한 대화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나는 미국 월드비전의 회장을 만났다. 로버트 사이플(Robert Seiple) 회장과의 대면에서 그는 나에게 강력하게 한국 월드비전 북미주 위원회는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회장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회장에게 “운영을 중단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나는 미국적십자사와 미국보이스카우트의 조직체제를 알고있었기에 그의 제안을 곧 받아드릴 수 있었다. 북미주위원회에 총재와의 대화 내용을 알리고 이 일을 그만 두자고 제안했다. 한국 월드비전의 북미주 위원회는 그렇게 중단됐다. 그때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 했으나 순리적으로 총재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 훗날 미국월드비젼 코리안 데스크가 발족되는 길을 열어놓는데 기여하게 됐다고 믿는다.

1995년에 월드비전의 도린 영 부회장이 직원과 함께 내가 운영 중이던 샬롬 커뮤니티 센터를 찾았다. 미국 월드비전이 처음으로 북한에 곡식을 보냈는데 이미 선적되어 북한으로 가고 있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미국 월드비전으로 텔렉스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을 들고 부회장이 나를 찾았던 것이다. 텔렉스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곡식이 도착하더라도. 북한 당국과 어떤 상의가 있을 때까지는 곡식 보내준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도린 영 부회장이 나를 찾아와서 미국월드비전의 어드바이저로 위촉을 하고 나에게  “북한 관계를 위임할테니까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 일을 위해서 유급 직원과 사무실 그리고 무료 전화 등을  제공하겠다는 조건도 아울러 제안했다. 1995년 5월 12일자로 북한에서 미국월드비젼에 보내온 ‘Friendship Food for N. Korea’제목의 탤랙스를 검토한 후 나는 곡식 보낸 것을 외부에 노출하지 말라는 북한의 부탁을 지키도록  도린 영 부회장에게 조언했다. 나는 이미 1991년에 북한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 북한 스타일을 잘 알았기에 그렇게 충고를 했다. 내가 당장에  미국 월드비전 과 좋은 조건으로 일을 하는 것 보다는 북한과 신뢰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 월드비전 도린 영 부회장에게 “북한하고 신뢰가 깨지면 안 되기에 나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후 북한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외부에 곡식 지원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6년 쯤에 월드비전이 시애틀로 본부를 옮기기 위해서 새로 건축을 하고 봉헌식을 했다. 그때 그간의 봉사와 조언에 감사한다는 공문과 함께 나를 초청했다. 나는 새로 건축된 빌딩을 둘러싸고서 봉헌식 테이프를 초청받은 인사들과 함께 끊었고 지역 신문과 인터뷰도 했었다. 한국의 .6.25전쟁이 계기가 되어서 발족한 월드비젼이기에 나의 참석은 미국 기자들의 눈에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월드비전은 한인 2세인 조나단 심 씨를 채용했다. 조나단 심 씨는 월드비전 코리아 데스크의 책임자가 됐다. 미국월드비전의 고문으로 봉사하고있던 나는 정남식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코리아 데스크의 위원이 되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고인이 된 조나단 심 씨, 그 오른쪽 옆이 정남식 목사, 그리고 필자


우리는 시애틀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고, 코리아 데스크를 위해 각종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미와 콩나물’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던 김혜자 씨를 초청해서 기금 모금 행사를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제안을 했다. 장미와 콩나물은 MBC-TV에서 1999년 3월13일부터 1999년 9월 5일까지 매주 토,일 밤 8시에 방영했던 주말연속극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 드라마가 인기리에 종영이 된 시점이었고 김혜자 씨는 월드비전 친선 대사로 봉사했기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혜자 씨는 당시 북한을 방문한 직후였다. 그래서 나는 이 행사 이름을 ‘눈물 젖은 외출’로 정하자고 했다. 이전까지 나는 김혜자 씨를 본 적도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배우 임동진 씨가 뮤지컬을 미국에서 공연하고 싶어서 나를 초청하고 리셉션이 있었을 때 김혜자 씨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솔직히 당시 배우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지나쳤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배우와 인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연극과 연관되어 살았다.

잠시 과거 나의 연극활동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1964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데모(‘6.3사태’)를 주도한 후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 친구가 대학연극의 연출가이었고 나는 그 친구와 어울리며 연극에 심취하게 됐다. 연출가인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연극을 하는 서울시내 각 대학의  대학생을 연결해서 극단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학생들을 모아서 ‘대학극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참여했던 사람 중에서 지금은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어 있는 백윤식 씨, 드라마센터의 양서화 씨 등이 있었다.

친구의 희곡작품이 문화 공보부에서 주최한 희곡기금공모에서 당선작이 되어 우리는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올리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연극 제목은 ‘연이 불타는 계절’이었다. 친구 최헌진은 자신이 쓴  희곡을 연출했고 나는 기획을 맡았다. 그 당시 최헌진(현재 정신과 의사)을 통해서 그의  후배였던 김석만 씨 등을 만나게 되었다. 김석만 씨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이다..

나는 기획 일에 온 힘을 다 기울였다. 한번은 국립극장에서 연극이 시작하기 직전에 소품이 부족해서 객석에서 빌린 적도 있었다. 여배우에게 필요했던 악세사리가 없어서 객석에서 빌릴 수 있었다. ‘석학’이라는 작품을 했을 때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우리는 여자 주인공을 캐스팅하지 못해 소위 길거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친구 최헌진에게 “길거리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배우후보를 보게 되면 내가 섭외하겠다”고 말했다. 광화문 크라운제과 앞에서 여배우 후보를 오랜 시간동안 살피고 있는데 친구가 “저 사람인데 목소리가 허스키해서 안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여학생을 따라서 빵집으로 들어갔다. 대화를 들어보니 연세대 응원단 리더였다. 나는 그 쉰 목소리는 응원하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판단하고 섭외에 나섰다. 그는 사실 연대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였는데 그때 연고전의 응원을 맡고 목이 쉬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 “연극 끝날 때까지 사적인 것을 묻지 않고 당신의 이름마져 묻지 않을테니 여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그분은 나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배우로 캐스팅돼 연극 무대에 섰다.



미국으로 이민 온 뒤에도 연극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 나는 계속 연극인들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런 관계를 통해 내가 참여하게 된 작품이 1992년 4.29 폭동 직후 인종 화합을 위해 이중언어로 공연한 장소현 씨가 쓴 ‘민들레 아리랑’이었다. 이 작품은 대학 시절 인연을 맺은 김석만 교수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와 있을 때 연출을 맡게 되었다.

김석만 교수는 옛날 친분으로 나를 만나러 샬롬 커뮤니티 센터에 왔다가 구제 사업을 하던 나의 모습을 보고 깜짝 제안을 했다. 그는 내가 생필품 등을 흑인 라티노 한인 구분 없이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나에게 갑자기 “목사님이 무대에 서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얼떨결에 허락을 했고 나의 출연으로‘민들레 아리랑’의 제7장이 새로 씌어졌다. 내가 작품의  두 주인공과 함께 인종 화합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만드는 그런 내용이었다.

미주 한인사회의 연극계 여건은 척박하다. 하지만 LA에서 연극인들이 극단을 비영리 단체로 등록하고 활동하기를 원해서 2004년에  ‘극단 LA’를 창립하게 되면서 나는  이 극단의 대표가 됐다. 극단의 모든 일원들은 열심을 냈다. 5년이 지난 2009년 11월에는 뮤지컬 ‘LA 자 살자 관광버스’라는 작품을 한 달 동안 올리게 되었고, 남가주농아교회 교인들을 초청해 연극 전체를 수화로 통역해서 함께 할 수 있었다. 연극과의 관계를 좀 더 얘기하면 나는 1990년대에 한국의 ‘장보고’라는 뮤지컬을 LA 한인 사회에서 공연하도록 기획을 맡았다. 탤런트 임동진 씨(현재 목사))가 장보고 역으로  그리고 요즘  ‘다함께 차차차’에서  열연 중인 박해미 씨도 당시 이 뮤지컬에 참여했다.

뮤지컬 장보고(단장:김의경) 환영만찬의 사회를 보는 양현승. 원 안에 두 분이 박해미씨와 임동진 씨다.


다시 월드비전 이야기로 돌아오면 당시 ‘장미와 콩나물’이라는 드라마가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김혜자 씨를 초청했다. 오재식 한국 월드비전 회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일이 성사가 됐다. 내가 총무로 있던 세계 복음 선교 연합회 주관으로 LA에 있는 동양선교교회에서 토크쇼 스타일의 기금 모금 행사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갖는 행사 그리고 북한을 다녀와서 북한의 어린 아이를 도와달라는 행사는 보고식의 딱딱한 집회가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양하고 교회 예배당에서 갖는 행사였지만 토크쇼 스타일로 진행했다.

나와 김혜자 씨가 교회 예배당 중앙 무대에서 토크쇼를 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그 당시 새벽에 김혜자 씨를 깨워서 인터뉴스 커뮤니케이션의 지원으로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문자 생중계를 했던 기억도 난다. 나는 토크쇼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면서 종영을 한 ‘장미와 콩나물’중  콧날이 시큰하게 하는 한 장면을 행사 참석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팬들과 인터넷 채팅을 했던 당시 김혜자 씨가 잠시 기념 촬영을 했다.


이를 위해 그 연속극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비디오 테이프를 5개 정도 빌려다가 꼼꼼히 보게 되었는데 김혜자 씨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 중 인상이 깊은 부분을 편집하도록 해 집회에 참여한 분들에게 보여줬다. 반응이 뜨거웠다.

그 행사는 동양선교교회 예배실 모든 좌석을 꽉 채웠고 입석도 모자라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았다. 미주 중앙일보, 미주한국일보의 톡톡 튀는 광고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TV와 라디오 등 모든 한인 언론사를 통한 그야말로 홍보 대박이었다. 나는 LA 일정에서 김혜자 씨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김혜자 씨가 집회를 끝내고 뉴욕 집회를 위해 LA 국제 공항에 함께 가면서 뉴욕 집회도 같이 가자고 졸랐지만 나와 내 아내는 그저 웃기만 했다. 김혜자 씨에게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뉴욕 집회에는 많은 분이 모아지 않았다고 했다. LA에서는 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미국 월드비전의 고문과 코리아 데스크의 고문으로 일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월드비전 어린이 합창단의 공연, 조나단 심 씨와 미 전국을 다니면서 월드비전 코리아 데스크를 알리고 조직을 만들었던 일 등은 지금도 내 마음에 생생히 남아있다.


 조나단 심 씨가 자녀에게 남긴 동영상.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조나단 심 씨는 시애틀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이후에도 봉사관계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교제를 했다. 조나단 심 씨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위해 선물을 보낼 정도로 친분이 쌓였다. 그는 월드비전 일을 위해 함께 하면서 나를 멘토라고 불렀다. 그는 나의 경험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장래가 촉망되고 따뜻한 가슴을 가졌던 조나단 씨를 이제는 더 이상 이땅에서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여러 차례 구호현장을 찾아 열악한 상황에서도 강행군을 했던 조나단 씨는 누적된 과로와 설사에 따른 심한 탈수증세가 겹쳐 2005년 7월 3일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뇌수술을 받았지만 7월26일 뇌사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조나단 심 씨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냈던 이메일을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그는 나에게 “곧 꼭 뵙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 한 채 그리고 세계의 어려운 어린 아이들을 둔 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내게  부탁하는 그의 음성은 지금도 내 가슴에 살아있다. 그래서 월드비전은 아니지만 지구촌 공생회와 수단 어린이들을 돕는 아프리카희망후원회  및 사랑의 쌀 운동  등을 통해 2009년에도 나는 1997년 12월에  조나단 씨기 쓴 편지를 요즈음도 읽어보면서 봉사한다.

조나단 씨는 진지한 마음으로 늘 감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카드로, 때로는 이메일로, 때로는 전화음성으로 때로는 정성이 깃든 작은 선물로 잊지 않고 감사를 했던 분이었다. 쉽게 들릴 수 있지만 바삐 살다보면 그런 표현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지구촌의 불쌍한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그토록 헌신했던 조나단 씨를 기리는 마음이  내가 월드비전과 관계를 아름답게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0년 동안의 월드비전 봉사는 그렇게 마무리지어졌다. 나는 월드비전과도 적십자사처럼 평생 인연을 맺고 싶었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내가 원한다고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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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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