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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14.최종)-나의 가족, ‘커넥티드’의 근원

by 밝은터_NJT 2010.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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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4) 나의 가족, ‘커넥티드의 근원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광주 서중 1학년 시절. 서중, 일고에서 역사의식을 배웠고 길렀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아버지 등을 두 팔로 잡고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상쾌한 기분이 들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인 내 호주머니에는 작은 돈 봉투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자전거에서 나를 내려주시면 이웃에 진 빚에 대해 월 이자를 갚으러 친구 집에 들어갔다. 이잣돈을 전하고 나올 때 친구 책꽂이에 쭉 늘어선  참고서들을 보면서 부러웠다. 아버지께서 빚을 갚으려고 돈을 조금씩 마련하면 아버지와 나는 그런 식으로 빚을 갚거나 이잣돈을 내곤 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나는 사람과 연결되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리고 내 책상에서는 참고서가 한 권 없어도 수업시간에 귀를 쫑긋하고 듣도록 했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 집은 문중의 대장손이었기에 일년에 여덟번 제사를 지냈다
. 어머니는 제사를 모신 다음 날에는 음식을 골고루 싸서 친척 집에 갖다 드리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음식을 날으면서 친척집에 자주 다니게 되었다. 친척집에 다니면서 사람을 아우르는 성품이 길러졌다. 장손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척들을 연결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친구들은 아는 사람이 웅변 원고를 써줘서 웅변 대회에 나간다고 연습을 했는데 나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2층 강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웅변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손을 놓치 않고 나에게 지도를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목포에서 초등학생 대항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집안 사정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웅변 대회 하루 전날 아버지가 웅변대회에 가자고 해서 기차를 타고 간 기억이 난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당시에 녹음기가 희귀했을 때인데 뒷담을 뛰어내리면 시내 전화교환대가 있었다. 당시 전화는 교환원이 선을 연결해주던 방식이었는데 교환양 누나들이 녹음기를 놓고 연습하는 것을 보고 그분들에게 “내가 녹음기를  쓸 수 있냐”고 물었다. 교환양 누나들이 쓸 수 있도록 해 나는 녹음기에 나의 웅변 내용을 녹음해서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경험은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아버지는 큰아들로서 씩씩하게 자라도록 나에게 그러한 힘을 얻게해 준 분이었다. 

중학교 시절에 4.19가 발생했다. 한밤 중에 우리 집 담 밑에서 누가 쓰러져서 신음을 하고 있었다. 한 데모  참가자가 총상을 입고 우리 집까지 겨우 도망쳐 쓰러졌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우리집 뒷담장을 허물고 그 사람을 우리 집 안에 들어오게 했다. 동생이 갓난아이였는데 기저귀로 쓰려고 했던 천을 꺼내서 그 부상당한 학생을 묶어주는 장면을 목격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의거학생을 돕는 일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번은 여동생이 유치원을 다녀오다가 시내버스에 치었다. 큰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에 버스 운전기사가 우리 집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날은 그 버스운전기사의 어린 아이가 죽은 날이었다. 그 버스운전기사가 용서를 빌러 찾아오자 아버지 어머니는 그 운전사를 다둑거리며 “괜찮다”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그런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용서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두 분은 나에게 바르게 사는 것과 용서 그리고 당당함과 희생이 있는 사랑을 가르친 분들이었다.

1달여 만에 59명의 룸비니학생법회 회원을 확보해 전도왕(?)이 됐던 광주일고 1학년 시절


고등학교 때 나는 활동적인 아이였다. 같은 학년에 기독교 클럽을 만드는 아이가 있었는데 때마침 서울에 계시는 청담 스님이 룸비니 학생 법회를 만들도록 법사님을 광주로 내려 보내셨다. 그는 나에게 “너는 학교에서 활동적이니까 룸비니학생 법회를 조직해서 이끌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당시 나는 내 친구 김민영이처럼 불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거절하지 않고 학생 법회를 조직해 학생 50여명을 모집했다. 40여년이 지난 훗날 한 선배가 보관하다 보여준 그 당시의 사진을 보니 한 달 정도 기간에  법회의 회원으로 50명을 넘게 모집했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50명을 넘게 모집하니까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도왕(?)이 됐던 것이다. 청담 스님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는데 당시 경기고, 서울고, 경기여고 학생들이 서울역 까지 환영 배너를 들고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전도 비결을 물었다. 나는 “친한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나는 일이 있으니 참여하라고 말을 했을뿐 이다”고 답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광주일고 2학년 때 나는 2학년 8반 반장이자 학생회 부회장이었는데 어느 날 학급 회의를 통해 반 아이들의 좌석을 정하지 않고 등교하는 순서대로 앉게 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박남현 담임 선생님(유도 담당)은 이 안건의 통과를 승인하셨다. 그 담임에 그 반장이었다는 말이 나올만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열린 분이었다. 당시 경험은 훗날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묶어서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만약 담인 선생님이 나의 창의성을 무시하거나 누르셨다면 내가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일을 하는데 머뭇거리고 소심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

청소년기에 성장하면서 내가 평생 살아가면서 사회 생활, 이웃과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힘이 많이 길러졌다. 이 힘은 부모님의 사랑과 가족을 위한 희생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얻게 됐다. 남동생 3, 여동생 2명과 웃음꽃을 피우면서 나눈 청소년기의 사랑은 한 권의 책으로도 회고하기에 부족하여 다른 기회에 쓰고자 한다.


 딸 하나 양의 결혼식 영상. 영상의 끝부분에는 두 부부를 위해 특별히 작사, 작곡,
 편곡된 음악이 연주된다. [영상 촬영 및 편집=박병기]


나는 나의 딸 하나에게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온 1세대로 많은 노력을 할 때 2세대들은 부모의 희생에 대해서 일정한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늘 일깨워준다. 그렇게 하면 부담이 될 것 같지만 삶의  폭이 넓어지고 건강한 도전의식을 품을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딸에게 자주 했다. 딸이 결혼 하기  전인 2007 12월 초에 사위 후보와 첫 만남에서 나는 “One Minded Unit, Not Be  Narrow- Minded Individuals”라고  말했다. 한 마음, 넓은 마음으로 서로가 하나 되어서 넓게 생각하면서 북돋우며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아빠 엄마가 이민생활과 결혼생활에서 터득한 것을 이 아이들과 나누면서 건강한 결혼생활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표현으로 요약해서 해줬다. 내 딸아이는 이런 점을 마음에 잘 품고 사는 것 같고 더욱 감사한 것은 사위가 그런 마음을 함께 나누면서 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민 2세인 딸과 사위가 태어날 아이들에게 우리말(한글)을 가르친다니 그 또한 흐뭇하다.

딸 하나의 결혼식 때 아내, 딸, 사위와 기념촬영을 했다.


지난 2009 3월 딸이 결혼을 했을 때 병원에 계시기 때문에 오시지 못한 친할머니를 기억하면서 결혼식 가운데 사위가 할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표한 것은 아빠가 자라면서 그리고 엄마 아빠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랑과 희생으로 북돋아주신 할머님께 감사하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었다.

우리 아이는 엄마에게서 음식하는 것을 즐기면서 배운 것 같다. 시댁에서도 잔치가 있으면 자진해서 음식을 해가지고 간다고 하니 기쁘다. 엄마는 생활 중에서 쓰다 남는 것은 가능한 버리지 않고 재활용을 하는데 딸도 엄마를 잘 닮은 것 같아서 감사하다. 딸은 엄마하고 어렸을 때부터 걸스카우트과 적십자사 활동을 함께 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 길러져서 고맙다.

초등학생인 딸은 내가 귀가하길 기다리곤 했는데 이날 밤은 너무 늦으니까 노트를 써놓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나의 ‘커텍티드’된 삶을 살도록 헌신한 아내에게 감사를 표하고싶다. 결혼한 후 35년 동안 아내의 내조가 없었더라면 봉사활동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봉사활동을 하면 가정 생활에 희생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내는 물론 딸도 힘든 가운데서도 잘 인내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25주년 은혼식 때 성지 순례를 가서 가나안 혼례잔치가 열렸던 장소인 포도주 항아리 앞에서 지난 25년을 회고하면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내 마음 속의 필름으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아내가 출근할 때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싸주는 도시락이 그렇게 맛있다고 해 고맙게 생각한다. 내 아내가 은퇴할 때까지 시간 되는대로 나의  ‘샐러드’ 솜씨를 계속 발휘하려고 한다.


2009년 성탄절에 딸과 사위 그리고 아내가 함께 음식을 만드는 장면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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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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