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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13)-종교간의 평화

by 밝은터_NJT 2010.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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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3) 종교간의 평화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미주종교평화협의회 회원들


2009 12월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1210일의 일이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성 아그네스 한인천주교회의 이영찬 신부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12년 전에 김세율 신부님도 그렇게 만났었다. 이 성당의 주임이셨던 김세율 신부님이 계실 때도 사제관에서 함께 밥도 먹고 했는데 그날도 식사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오전 1130분에 도착했다. 이영찬 신부님을 찾아뵌 이유는 사랑의 쌀을 배부하는 장소로 LA에 있는 버몬트길과와 애덤스길 사거리의 성 아그네스한인 천주교회의 주차장이 너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앞 장에서 소개한 적이 있지만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LA총영사관, 미주중앙일보, 미주한국일보가  공동 주최하고 미주성시화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나눔의 운동으로 크리스마스 기간에 펼쳐졌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쌀 한 포당 10달러의 후원금을 모아 1만 포의 쌀을 구입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에게 직접 전달하고 독거노인 및 결식아동 등을 돕는 사회봉사단체에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이영찬 신부님께 함께 그 봉사를 하고 싶다고 뜻을 밝혔더니 그분께서 선뜻 받아들이시면서 기뻐하셨다. 이 신부님은 한술 더 떠서 “성당 바로 옆에 흑인 교회가 있는데 양 목사님이 찾아 뵙고 사랑의 쌀 나눔 잔치에 초청하면 어떻게냐”고 제안까지 했다. 나는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화답했다. 내친김에 히스패닉 교회도 연결했다. 이 신부님께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을 하고 그들에게 사랑의 쌀을 같이 나누자고 제안을 했고 곧 푸드뱅크를 하고 있는 매리안 수녀님에게 연락을 취해주셔서 사랑의 쌀 배부 관계를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아울러 미주종교평화협의화가 불자들과 함께 반야사에서도 사랑의 쌀을  나누었다.

종교나 종파와 문화의 차원을 넘는 사회복지 및 인권과 평화 운동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이웃종교 리더들과 함께 미주 종교평화협의회라는 단체를 공동으로 조직해 10년 이상 활동했다. 지금 이 구술을 하고 있는 시점에도 가장 활발히 종교평화 및 사회복지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단체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조직됐다. 1997년의 일이다. 당시 북한이 수재를 겪으면서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있었다. LA의 한인 사회는 옥수수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그때 옥수수 모금 운동을 전개하면서 개신교만 할께 아니라 천주교, 원불교 불교 등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나는 김세율 신부님을 만나게 됐다. 박희민 목사님(당시 나성 영락교회 담임) L.A.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사무총장이던 나에게 목표량을 물었을 때 나는 옥수수 1천톤(16만달러)을 목표로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한인 사회는 종교계가 합심해서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고 십시일반으로 헌금을 해 목표액의 두 배를 초과한 36만 달러가 모금됐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에 직접가서 옥수수를 전달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든 생각이 이웃 종교와 함께 활동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도안 스님, 김세율 신부님, 그리고 나 3명이 중심이 되어 북미주종교협의회를 창립했다. 북미주종교협의회는 이후 꾸준하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우리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조선종교인협의회(북한)와 교류를 시작했다. 2002 10월 북미주종교협의회의 사무총장이었던 나는 한국에 나가서 7대 종교 단체의 대표격인 한국 종교지도자협의회를 방문하고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북미주종교협의회는 이후 미주종교평화협의회로 개칭하고 꾸준한 활동을 했다. 이 단체 안에서 신부님, 스님, 교무님, 목사님이 친해져서 어떤 때는 원불교당에서 모여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어떤 때는 사찰에서 다른 때는 천주교 수도회에 찾아가서 교제를 했다. 그러면서 이웃종교에서 대해서 서로 이해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래서 지금 13년의 세월을 이와 같이 교류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 내용을 미주 중앙일보 오수연 기자가 상세히 소개했는데 구술을 잠시 접고 그 기사를 소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2009 69일자 미주 중앙일보 종교면 1면에 소개된 내용이다.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도생 훈련도 해봤지.” 김현철 스님 <불교·반야사 주지>

“공의를 위해 모이는데 갈등이 생길게 있나요.” 최정안 교무 <원불교·원불교 미주 서부 교구장>

“어디에서도 종교 평화를 위한 마음은 한결 같을 겁니다.” 이태영 신부 <가톨릭·성프란치스코한인천주교회 주임신부>

“기독교 선교사의 하나님만 하나님이 아닙니다.” 김요한 신부 <성공회·성 프랜시스 성공회교회 한인 목회>

“타종교를 알아야 단단한 신앙을 다져나갈수 있습니다.” 김기대 목사 <개신교·평화의 교회 담임목사>

입성이 범삼치 않기 때문일까. 까만 양복, 로만칼라, 한복, 승복까지 제각각이다.

겉으로 봐서는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이들인데 서로를 대하는 분위기는 살가운 것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이날 함께 자리한 6명의 단짝은 최정안 교무(원불교), 김요한 목사(성공회), 김기대 목사(개신교), 김현철 스님(불교), 이태영 신부(천주교), 양현승 목사(개신교). 그리피스 파크 오전 산책부터 단짝들의 점심 식사까지 그들의 특별한 우정을 동행했다.

원불교, 성공회, 개신교, 불교, 천주교. 5종교가 허물없이 친구를 먹은(?) 지는 13년째. 미주종교평화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모임은 단체에 국한되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멤버가 바뀌기도 했다. 입적한 도안 스님과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떠난 김세을 신부 김혜봉 교무의 빈자리를 현철 스님 이태영 신부 최정안 교무가 채웠다.

"전임자들이 떠나가기 전에 새 친구를 소개해주고 떠나더군요. 끊어지기에는 너무나 값진 만남이기 때문이겠지요."(양현승 목사) 그렇게 우정은 대를 이어왔다. 계속된 그들의 만남은 결코 형식적이지 않다. 한 달에 한 번 정기 모임 외에도 수시로 만난다. 성공회 교회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스님과 개신교 목사가 함께 참석해 성탄절을 축하한다.

큰스님이 LA를 방문하면 함께 인사한다. 각 종교의 행사가 있을 때는 상의도 하고 적극적으로 돕기도 한다. 지난 2월에는 이태영 신부의 형이기도 한 이태석 신부를 돕기 위해 이들 모두 함께 나서 '아프리카 희망나눔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인터뷰를 위해 오른 그리피스 파크의 분위기는 딱 소풍이다. 최정안 교무가 현철 스님이 맨 빨간색 스카프를 보고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한다. 그 옆으로는 둘 셋 모여 사진 찍기 바쁘다. 오랜만에 산에서 모였더니 기분이 좋단다.

잠시 파크를 산책하다 옹기종기 크고 작은 돌 위에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 때가 멀지 않아서인지 역시 밥 얘기가 먼저다. 평소에도 순번제로 밥을 산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홀애비들이 많이 사지."(김요한 신부) 이태영 신부와 현철 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시 함께 밥을 먹어야 친해진다는 얘기다. 이어 반야사 칼국수와 원불교 산채무침이 화두에 올랐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웰빙 음식이라고 신부와 목사가 자기네 집 솜씨인양 떠들석하게 자랑이다. "내일 칼국수들 먹으러 오시오."(현철스님) 송월주 스님 대접하려 칼국수를 만드니 오라는 말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정안 교무가 누구누구 갈꺼냐며 교통정리다. 친구들이 맞다.

이들의 모임은 장소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일년에 한 번은 도시를 벗어나 함께 캠핑을 한다. 텐트며 먹거리를 싸들고 모닥불을 피우고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운다. 자주 보는 데도 할 이야기들이 많단다.

양 목사가 내친 김에 자랑을 시작했다. "지난 5월에 딸이 결혼식을 했는데 누가 축가를 했는지 아십니까. 하하하." 목사의 딸 결혼식 피로연에서 목사와 스님 신부가 함께 '사랑으로'를 축가로 불렀단다. 너무 좋은 모습이었다며 사진도 한 장 보여준다. 진짜다. 하객들이 한편으론 놀랐지만 한편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며 추억의 한 자락으로 간직하고 있다.

요즘은 6월 말이면 한국 나병 환자촌으로 떠나는 이태영 신부와 이별을 앞두고 아쉽기만 하다. "떠나긴 하지만 장소만 다를 뿐이지 한국에서도 하나의 모임을 만들어 종교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이태영 신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대화가 시작됐고 식사가 나왔다. 다른 종교가 모였으니 함께 기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오늘은 김기대 목사가 한국으로 가는 이태영 신부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모두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각기 다른 신앙을 가졌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이웃 종교에 대한 존중과 열린 마음이다.

여전히 다른 믿음을 가진 종교, 그것도 지도자들이 모였으니 논쟁이 잦지 않느냐는 기자의 의구심 어린 질문에 “공의를 위해서는 종교를 떠나 뜻을 한데 모읍니다. 종교를 위한 종교는 안됩니다.(최정안 교무) 반박할 것도 없이 깨끗하게 못박는다. 모두가 명쾌한 대답에 수긍하는 눈치다.

이들의 열린 마음은 1~2년 사이에 생긴 것이 아니다. 현철 스님은 다른 종교를 알기 위해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 체험을 했다. “인류역사를 봤을 때 전쟁의 3분의 2 이상이 종교전쟁입니다.

지금도 80~90%는 종교적인 갈등이나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대화와 이해가 부족합니다. 자기 종교가 좋다고 독선에 빠지는 건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는 모르고 자기종교만 안다는 것은 자기 종교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현철 스님)

김기대 목사 역시 석사학위는 불교로, 박사는 한국 종교사로 받았다. “다른 종교를 알기에 더욱 자신의 신앙을 견고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김기대 목사) 다른 종교를 안다고 해서 결코 자기 종교에 소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LA를 방문한 송월주 스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인사를 위해 두 손을 합장해 보였더니 오히려 스님이 악수를 청하시더군요.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양현승 목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어느 곳에도 안 계신 곳이 없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하나님을 데리고 간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섬겼다. 기독교 선교사의 하나님만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찾은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너희가 찾은 하나님은 엉터리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김요한 신부)

“그렇죠. 엄마는 하나의 이름으로만 불리지 않죠. 누구에게는 며느리고 또 누구에게는 딸이고 아내예요. 이렇게 한 명에게 여러가지 호칭이 있듯이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하느님)도 지역과 제도와 문화와 언어에 따라 달리 나올 뿐이지 같은 분이라고 봅니다.(최정안 교무)

1997년 도안 스님과 김세을 신부를 위시로 창립됐으며 종교화합을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북한의 인권과 구호와 이민사회를 위한 사회활동도 활발히 펼쳐왔다. 지난 해에는 제1회 미주종교평화협의회 상을 제정하고 종교의 평화를 위해 힘써온 김광준 신부에게 그 상을 수여했다. 현재 양현승 목사가 상임대표를 맡아 단체를 이끌고 있다. <미주 중앙일보 오수연 기자>


이 기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미주종교평화협의회는 한인 사회 안에서 종교 평화의 역할을 맡으면서 동시에 타 지역의 종교인들과도 꾸준한 교류를 했다. 2004년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아시안종교인평화회의에 미주종교평화협의회는 3명의 대표단을 파견했으며 2008년 12월 뉴욕 유엔 아동기금(UNICEF) 강당에서 가진 유엔 산하 종교 NGO 관계자들의 합동 세미나에 나를 파견했다.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와 종교평화국제사업단(IPCR)이 공동 주최한 세미나에는 100여명이 참석, 다양한 종교들이 평화구축, 개발계획, 인권보호 등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윌리엄 밴들리 WCRP 사무총장, 유엔 종교 NGO 위원장 조앤 커비 수녀, 알렉산더 앰브러모이 모스코바 주교회의 대표단 사무총장, 세이이드 시이드 북미이슬람협회 사무총장 등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UN종교 NGO모임에서 상호협력을 논의한 윌리엄 밴들리 WCRP 사무총장(사진 오른쪽). 미주종교평화협의회가 미국종교평화협의회의 가맹단체로 가입토록 도왔던 허츠 유대교연대 공동의장(사진 왼쪽). 


이후 2009년 2월에는 WCRP 공동대표 겸 유대교연대 공동의장인 주디스 허츠 씨의의 추천으로 미주종교평화협의회가 미국종교평화협의회의 가맹단체로 가입됐다. 상호 연결해서 공동으로 일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판단해 나는 미국종교평화협의회 가입에 정성을 기울였다.

미주종교평화협의회가 결성되자 극한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연락이 오곤 했다. 괌에  KAL기가 추락했을 때 미국적십자사 워싱턴 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면 좋겠는가, 유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는 질문을 했을 때 천주교, 불교, 원볼교, 개신교 대표가 컨퍼런스 콜을 해서 어떤 종교 의식인가 논하는 것 보다는 그분들을 따뜻하고 정중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해줬다.

또한 김수한 추기경님이 선종 했을 때와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미주종교평화 협의회가 미주 지역 종교의례를 책임졌다. .


앞서 소개했지만 우리는 단순히 공의를 위한 종교적인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연말이 되면 함께 모여서 노래방 기기를 설치하고 노래자랑 대회도 열어 기쁨을 공유한다. 월례 정기회를 하고나서 영화 ‘국가대표’를 함께 감상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다보면 이웃 종교를 안다는 게 자신의 종교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 종교를 더 잘면 알수록  이웃종교인들이 귀하게 여겨진다. 그들 모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천주교 신자님들이 교류하는 웹사이트에도 등록해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지 모른다. 얼굴을 모르는 분들인데도 서로 존중하는 대화가 오고갈 때 삶의 행복감을 풍성히 누리게 된다. 나의 회고록을 인터넷에 올리자 천주교 신자 모임의 이화라는 분이 오셔서 따뜻한 댓글을 올려주신 일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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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쌀 1만포' 종교의 벽도 허물었다
[LA중앙일보]
2009년 12월29일



한인사회와 단체들이 하나되어 만들어낸 '사랑의 쌀' 1만여 포가 남가주 전역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200여 사회.종교단체를 비롯해 한인들이 후원한 이번 캠페인이 이뤄댄 소득은 여럿 있겠지만 범종교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교계 관계자들은 높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난 23일 한인타운 인근의 성아그네스 성당에서는 400포의 쌀이 한인들을 비롯해 히스패닉과 흑인 등의 이웃들에게 전달됐다.

이날 배포를 위해 모인 곳은 성당. 쌀을 나누는데 손길은 보탠 이들은 바로 개신교계와 불교계 원불교계의 성직자들이었다.

남가주 한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종교단체들은 다 모인 셈이다.

이들 모두는 다른 종교에 속해있지만 이날 만큼은 하나가 되어 쌀 한 포 한 포를 이웃들에게 나눠주는데 힘을 모았다.

이날 성아그네스 성당과 반야사에서의 배포를 맡아 일한 양현승 목사(미주종교평화협의회 상임대표)는 "다양한 악기의 소리를 지휘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종교간의 또 인종간의 화합도 잘 지휘될 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오늘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 참여해 나눈 이 현장에서 화합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배포에 참여한 원불교 최정안 교무는 "범종교적으로 이웃을 돕는 일이 앞으로 더 자주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여기 나와보니 이 캠페인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더 든다"고 강조했다.

남가주 사원연합회 회장인 만성 스님 역시 "종교를 초월해서 같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 행사 속에서 훈훈한 정이 느껴진다"고 전했다.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로 이날 배포에 참여한 박세헌 목사는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힘쓰셨다. 나눔은 종교를 초월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앞으로 교포 사회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 나눔의 무브먼트가 일어났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성 아그네스 상당의 협력으로 한인들 뿐 아닌 히스패닉과 흑인 등 타 인종들도 혜택을 받았다.

성아그네스 성당의 매리안 수녀는 "이웃들에게 좋은 양식을 나눠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한인 커뮤니티의 관대함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인근에 살고 있는 한인 노인들 역시 이날 혜택을 받기 위해 작은 카트를 하나씩 끌고 차례를 기다렸다.

성아그네스 성당 인근 노인아파트에서 18년간 혼자 살고 있다는 박명일 할머니(79)는 "성당 할머니(성아그네스 성당 수녀)가 티켓을 줘서 왔다"며 "평소에는 양쌀을 배급받아 먹는데 귀한 한국쌀을 받게 되어 너무 기쁘다"며 말했다. 할머니는 이어 "올해부터 정부지원이 많이 끊어져 힘들었는데 (쌀을)귀하게 먹겠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글. 사진: 미주 중앙일보 오수연 기자]

미주종교평화협의회 활동 내용

♡ 김요한 신부의 홈리스 사역을 돕기위한 불교합창단의 기금모금 음악회를 도움.
♡ 2010년 1월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과 공동으로 학술대회 개최 및 2010년 인구센스 캠페인의 적극적인  참여도 계획 중.
♡ 미주종교평화협의회는 불교계에서 펼치는 지구촌 공생회(대표 송월주 스님) 활동과 천주교의 미주아프리카후원회 돕기에 참여 중.
♡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에 의해 억류된 한국인 인질들의 석방 촉구 기자회견을 회교 지도자들과 가짐
♡ 겨레얼살리기 세계한민족대회 참가, 위안부 하원 결의안 (HR121)통과를 위한 캠페인 및 기금모금 등에도 참여.
♡ 천주교인이었다가 출가한 현각스님 초대해서  대화를 나눔.

[자료제공: 미주종교평화협의회]

  미주종교평화협의회의 아이티 지진재해 현장 봉사단의 일원으로 2010년 2월 아이티에 다녀왔다. 아이티 지진 생존자들이 임시 숙소(텐트)에서 거처하고 있는 현장에서 쌀을 나눈 후에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참여했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은 즐겁기 때문에 현지에서 운전해준 안드레아 씨가 노래를 부르자 나도 아이들과 어울려서 르네 선교사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2010년 2월20일 촬영. 사진 제공=한요한 선교사.

 사진 윤관명 교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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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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