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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10)-미적십자사 점거 사건

by 밝은터_NJT 2009.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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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10) 미 적십자사 점거 사건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인터뉴스) 정리 및 편집


나는 어느 교회에서 보이스카우트 프로그램의 진행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LA한인 타운에서 피켓을 들고 데모한다는 말이 들렸다. 나는 프로그램 진행을 다른 리더가 하도록 하고 데모하는 곳으로 뛰어갔다.

1980 518일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피바다가 된 상황에서 LA의 한인들이 데모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데모를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데모만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이 죽어가는 데 단순한 데모만을 우리가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데모로 투쟁하던 리더들에게 미국 적십자사 LA혈액원에 가서 헌혈을 하고 그 헌혈한 피를 한국으로 보내자는 의견을 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내가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봉사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헌혈한 피를 광주로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 또한 그렇게 헌혈된 피를 보내자고 호소를 하면 미국 주류 언론에 보도되어 광주에서의 참상을 전 세계에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순순히 헌혈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미국적십자사에 헌혈된 피를 광주로 보내달라고 농성을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적십자사 남가주 혈액원 대표인  노먼 키어씨는 나와 친분이 있었다. 내가 혈액위원회 위원이었기에 나의 생각을 들은 키어씨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하면서 도울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적십자사 직원 한 명이 이 일을 전적으로 돕도록 지시했다. 브라이언 스마우스라는 직원은 한국인이 헌혈을 하러 올 것이기에 한국어를 하는 간호원이 오면 좋겠다고 주선을 해주는 등 우리를 잘 도왔다. 이러한 계획과 진행상황을 신한민보에 있는 투쟁위원회 사무실에서 구체적으로 상의했다. 위원들은 곧바로 동의했고 그들은 전단지를 만들어 LA인근에 뿌리고 광주에 헌혈한 피를 보내는데 뜻을 모았다.


브라이언 스마우스 씨가 쓴 당시 일지 (옆의 파일을 클릭해서 여시면 나머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LA 한인타운 중심부에 있는 아드모어 공원(현재 국제공원)에 모여서 광주 참상에 대한 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우리는 행진해서 미적십자사 LA지부 안에 있는 혈액원으로 향했다. 이 단체 행동의 대변인역은 장태한 씨(당시 대학생, 현재 대학교수)가 맡았다.

본격적인 헌혈이 시작했다. 김상돈씨와 윤선식 목사 등이 헌혈 하려고 왔고 일반 시민이 헌혈에 참여했다.

헌혈이 진행되면서 나는 헌혈이 광주로 보내질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혼자 단식을 시작했다. 적십자사 LA지부 내부 혈액원에는 소강당이 있었는데 나는 군인용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면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단식 투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소개하겠다.

우리는 헌혈 및 단식을 하면서 동시에 백악관에 전문도 보내고 전 세계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는 양식 있는 한국계 미국시민으로서 전두환 중장이 이끄는 한국 정부가 저지르는 군부의 만행에 대해 항의하는 바입니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당신이 인권을 가장 앞장 서 주장해 온 인물로 믿기 때문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당신이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한국인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불행히도 한미연합사령부가 또다른 독재정권을 모색하는 한국의 계엄 당국에게 부분적인 통제권을 이양시키는 것을 미국 정부가 동의했다는 나쁜 소식을 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한 진실을 매우 간절히 알고 싶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인권과 생명을 대통령께서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시길 우리는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악의 사태에 처한 한국에 대해 적절한 대응과 도움을 주도록 대통령의 선처를 바랍니다. (후략)


미 언론을 통해 전라남도 도청이 군부에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 미국 언론이 당시 광주 소식을 생생하게 전해 미국에서는 한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언론 통제를 하면서 광주의 폭도들이 정부에 대항한다는 보도를 해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적십자사 혈액원 농성자 중 한 분은 김대중 씨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직접 통화를 해 서울 상황을 파악하기도 했다. 전 세계로 전화를 할 때 적십자사의 전화를 사용했는데 전화세가 엄청나게 나왔을 것이다. 우리는 적십자사에 전화비를 내겠다고 했지만 적십자사에서 자신들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당시에는 국제전화 통화료가 엄청나게 비쌌다.

당시 점거농성이 심화하자 미 주류 언론이 취재를 했다. 우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리고 헌혈을 광주로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여론 몰이를 했다. 총인원 약 400여 명이 농성에 참여했는데 메모리얼 연휴(한국으로 말하면 현충일)가 끝나자 특히 학생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러나 전 세계로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데 더 열심을 냈다. 우리는 미국 적십자사가 한국 적십자사 총재 이호 씨에게 정식으로 텔렉스를 보내도록 독려했다. 한국 적십자사에서는 헌혈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가 왔다. 당시 UPI AP 통신은 광주지역에 피와 음식이 부족하다고 보도했지만 한국 적십자사 측은 “현재 상황에서 피 공급은 광주지역의 수요량에 비해 적절하다”면서 혈액 수급 거절 의사를 밝혔다. 

군이 광주로 진입하고 도청을 함락하고 헌혈된 피가 한국으로 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시위대는 실망했다. 자신들의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득의 변을 내놓았다. “광주의 시민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농성을 푼다는 것은 훗날 산 자로서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며, 어쩌면 현재 이 자리에서 자그마한 노력이라도 기울이는 우리 외에는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광주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는 집단은 없다. 우리라도 해야 한다! 태평양을 가로 넘어서 같은 민족이 똘똘 뭉쳐 서로의 생명과 삶을 지켜주는 것은 민족으로서 의무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까지 싸워야 한다!


당시 미주 한인 언론 보도 내용. 한인 기자가 현장 취재를 했지만 UPI발로 기사를 내보냈다.


이때 나는 무기한 단식을 선언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단독 단식 농성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고, 그나마도 없다면 광주의 비극을 모든 민족 성원이 수수방관하는 상태에 빠질 것으로 생각했다. 단식이 시작됐고 단식 사흘 째 되던 날 내 모습이 점점 수척해지자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단식 사흘 째가 되니까 “양 선생의 단식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상일, 국영길, 김운하 씨 등이  밤 늦게 까지 장시간 마라톤 회의를 했다.

나는 이 농성을 위해 집에서 나올 때 당시 3살 짜리 딸 하나와 아버지, 어머니 세 식구만 남겨뒀다. 나머지 가족은 모두 적십자 점거 농성에 가담했다. 애를 맡겨 놓고 나오는 심정이 참담했다. 광주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내 목숨을 바쳐서 피를 흘리기로 결심하고 나갈 때 3살 짜리 딸이 가장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를 비롯해서 우리 식구가 딸을 잘 키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문을 나섰다. 나는 죽을 각오로 점거 농성에 임했던 것이다.

마라톤 회의 결과 나의 단식 농성을 중단시키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전체의 투쟁을 위해서 간곡한 심정으로 나를 설득했다. 나는 사흘 만에 단식 농성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각오를 했다. “지금 이 순간 죽었으니 앞으로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단식을 하면서도 분노로 인해 육체의 고통이 자리할 틈은 전혀 없었다.

적십자사의 노먼 키어 씨가 단식 농성을 했던 나에게 다가와서 “괜찮냐”고 물어봤다. 키어 씨는 따뜻하게 우리를 받아주었고 시간대별로 우리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의 부하직원인 브라이언 스마우스씨가 작성한 리포트를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CBS, NBC, ABC 등 미 주요 TV방송을 비롯해 미국 언론에서 상세히 보도했지만 한국에서는 완전히 차단되어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알려졌다. 미주 한인 언론은 점거 농성 현장을 취재했지만 보도를 하지 않았다. 취재하고도 외신을 인용해서 단신으로 취급했고 미주동아일보만 유일하게 이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사건은 머나먼 고향인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거리를 초월해서 연대를 했다는 점,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연대한 점, 광주가 투쟁할 때 광주가 그렇게도 울부짖으며 바라 보았던 미국 땅의 동포들이 동참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 광주 시민을 위해 싸웠던 집단은 LA 한인 동포 400여 명이 유일했다. 나중에는 100, 70, 50명으로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들의 숭고한 마음은 지금도 나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의 민주화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LA 한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2004년도에 민족학교에서 인턴으로 5.18기념재단이 파견했던 최주식 씨는 ‘해외동포에게 진 빚 갚아야’라는 제목으로 5.18기념재단 발행의 ‘주먹밥’이라는 잡지에서 주장했다.
 


나는 당시 죽을 각오를 하고 투쟁에 참여했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이미 죽은 목숨을 다시 산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고있다. 나는 나의 장래를 죽은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하고 인권운동과 사회봉사에 바치며 살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런 굳은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갈등이 나를 엄청나게 괴롭혔다. 나는 이전에 한국 땅 DMZ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예수를 영접했는데 그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현장에 예수님이 계시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까 하고 궁금해 했다. 그 갈등이 나를 괴롭히면서 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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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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