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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양현승 '커넥티드'

양현승 커넥티드(3)-노스리지 대지진

by 밝은터_NJT 200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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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3) 노스리지 대지진



1994 117일 새벽 430.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안이 크게 흔들렸다. 나와 가족은  너무 놀라 식탁 밑으로 피신했다. 노스리지 대지진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꽤 오랜 시간 집이 흔들렸다. 개스와  전기가 끊겼고 집안에 있던 가재도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지진은 당시로는 미국에서 발생한 자연재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72명이 사망했고 9,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재산피해는 200억 달러 수준이었다. 한 언론은 노스리지 지진은 미국 역사상 가장 피해가 큰 자연재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우리 집은 노스리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노스리지는 샌퍼난도 밸리라고 하는 큰 분지에 있는 도시다. 내가 살던 곳도 샌퍼난도 밸리에 있었다. 샌퍼난도 밸리는 쉽게 밸리라고 부른다.


내가 살던 곳은 개스가 끊기고 전기가 나갔다
. 날이 밝아올 때를 기다렸던 나는  LA 한인 타운으로 가서 지진 상황을 파악하고 지진 피해자들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족이 힘들어할 것을 생각해 약간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딸 하나(당시 고등학생)가 나에게  “아빠, 우리는 알아서 할테니까요, 아빠는 커뮤니티 전체를 도와야 해요”라고 말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딸과 아내의  말에 격려가 된 나는 집안에 일부 부서진 곳도 있었지만 차를 몰고
LA 한인 타운을 향했다. 나는 즉각 내가 대표로 있었던 샬롬 커뮤니티 센터로 갔다. 샬롬 커뮤니티 센터는 한국어로는 한미구호봉사기구로 알려졌다. LA 폭동 때 만들어진 한미봉사단체연합은 곧바로 한인 사회의 단체장들을 소집했다. 단체장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지체 없이 모였다.

나와 단체장들은 첫 모임에서 ‘지진이 발생한 밸리 쪽에 구제 센터를 만들자’는데 뜻을 함께 했다. 지진이 난 곳은 LA 한인 타운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있었다.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나는 지진의 중심지나 마찬가지인 카이저 병원 앞에 있는 한인 교회 밸리연합감리교회(당시 담임목사 차현회)가 적당한 구제 센터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 교회도 일부 파괴되어 있었다.  카이저 병원은 노스리지 지진으로 완전히 내려 앉아버렸고 이 교회는 카이저 병원의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교회에 연락해 지진 피해 현장에서 구제 센터를 가동하겠다고 말했더니 교회 측은 기꺼이 그렇게 하라고 응답했다.


나와 김봉환 씨가 공동 회장이었던 한미봉사단엽합을 중심으로 한인 지진 피해 구제 센터가 지진이 발생한 그날 오전에 세워졌다
. 당시 한인회(회장 김영태) 회장도 구제 센터로 달려왔고 많은 한인 사회 지도자가 지진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 단체 조직에 대한 공식 발표는 며칠 후에 있었다.


 <미주 중앙일보 1994년 2월22일자 기사>


한인지진 피해복구 센터는 급하게 두 가지 조치를 하기로 했다. 먼저, 지진 복구 센터를 구축하고, 두 번째는 남편과 큰아들을 잃었던 이현숙 씨를 방문하는 일이었다. 이현숙 씨는 노스리지 강진으로 거주하던 아파트가 무너져 남편과 큰 아들을 잃었다. 또한 막내아들인 제이슨 군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임동선 목사(선명회 북미주본부 회장), 황성수 목사 그리고 나는 이현숙 씨가 임시로 머물고 있던 곳을 방문했다. 우리는 이현숙 씨와 다리를 다친 제이슨 군을 위로하고 함께 기도를 했다.


지진 발생
4시간쯤 후인 오전 8시부터 피해복구 센터가 문을 열었다. LA 폭동 당시에 손발을 맞췄던 경험으로 일사천리로 복구 센터 문을 열 수 있었다.  


LA 폭동 당시 각 단체가 힘을 합한 경험이 있었기에 지진 당일 오전 8시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빨리 진행했던 것은 김봉환(KYCC), 홍순형(남가주 한인 노동상담소), 김영태(한인회장)  등이 빠른 대처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미봉사단체연합이 중심이 돼 세워진 한인 지진 피해 복구 센터는 일단 먹을 것 등의 급한 것을 챙기는 것부터 한인들이 연방긴급사태관리청(FEMA)에 피해 상황을 알리고 필요한 복구비용을 받아내는 일을 도왔다.


이 일을 위해 무려
13개 한인 단체에서 일정 인원을 차출해 한인지진복구센터의 일원으로 봉사토록 했다. 2년 전 4.29폭동 직 후1세와 2세의 봉사단체들이 협력하여 조직했던 한미봉사단체연합이 조직력을 발휘하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당시 참여한 단체는 LA 한인회 ,한인청소년회관(KYCC),남가주한인노동상담소(KIWA),한미 변호사 협회, 한미 연합회, 한미 구호봉사기구(샬롬 커뮤니티 센터), 가정 법률 상담소, 한인 건강 정보 센터, 한인 청년단, 가주 한인 건설 협회, 한미 식품상 협회, 한인 공인 회계사 협회, YWCA, 남가주한인보험협회 등이었다.


이 단체들에서 차출된 봉사자들은
3개 분과 위원회를 조직했다. 업무, 긴급구호, 기획으로 나뉘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복구 센터 개원 소식이 알려지자 식수와 라면, , 김밥 등이 센터에 답지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한인이 정성을 담아 필수품을 보내줬다.


미 주류 사회에서도 도움을 줬다
. AT&T에서 당시로는 상당히 비쌌던 업무용 셀률라 폰을 보내 사용토록 해줬고 일반 전화회사에서 무료로 핫라인 전화시스템 시설을 가설해줬다.


복구 센터를 운영하면서 좋은 인상을 준 분이 있었는데 당시
LA총영사였던 김항경(왼쪽 사진) 씨였다. 김항경 총영사는 직접 연방긴급사태관리청을 방문해 협조를 요청했고 우리 센터에 전화를 수시로 걸어 진행 상황을 살피면서 공조체제로 일을 도왔다. 그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총영사로서 해야 할 일을 잘 감당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복구 센터는 중요한 일을 한 가지 해냈다
. 한 상업용 빌딩이 있는 큰 주차장에 대형 텐트를 쳐서 연방긴급사태관리청이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한 것이다. 이 일을 위해 1.5세 한인들이 중심이 된 한미연합회(KAC)와 주정부 및 정계에서 일하는 한국계 보좌관들이 애를 썼다.


당시 대형 텐트는 마치 서커스단의 텐트와 같은 모양이었고 이곳에서 1백여 명이 일할 수 있었다
. 나는 한인 피해자들과 좋은 유대관계가 이루어지도록  그곳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지진피해자들을 위해서  마련했던 음식을 대형 텐트(FEMA Mobil Unit)까지 손수 배달하여 대접했다.이로 인해서 사람의 정이 전해졌는지 그들과 좋은 유대 관계가 맺어질 수 있었다.

연방긴급사태관리청(이하 FEMA. 발음 피마’)과 한인 지진 피해복구 센터는 긴밀한 협조 관계가 됐다. FEMA측도 우리와 협조 관계를 맺는 게 중요했다. 지진이 일어났던 지역에는 많은 한인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FEMA 측은 사무실 개설 소식을 한인 사회에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러나 충분히 준비를 한 후에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24시간 정도 연기를 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에서 홍보가 시작됐다.


나는
FEMA 직원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지진 복구 센터가 했던 일 중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국밥을 만들어 무료로 제공하는 일이었다
. 피해자들이 따뜻한 국밥과 김치를 먹을 수 있게 했다. 나는 LA에 있는 한인 교회에 부탁을 해서 점심과 저녁에 교회가 직접 구입한 재료와 자체 봉사자로 음식을 제공하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교회가 동원됐고 도우려는 손길이 줄을 이었다. 국밥 등 한국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대기명단에 있는 교회의 수가 꽤 많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국밥을 제공하는 일에 수백 명의 봉사자가 보름 정도 참여해 점심과 저녁을 제공했다
. 식사 제공을 받은 분들은 “같은 피해자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나는 국밥을 먹을 때는 온 가족이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재정적 피해복구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가라앉히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진 복구 센터가 했던 다른 중요한 일은 지진 성금과 긴급생활필수품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 성금과 구호품을 나눠주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물품이 일정하지 않고 골고루 배분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공급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품을 받은 사람 중에는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뒤늦게 온 사람은 물품을 받지 못해 불만을 토로했다.

                   <성금 분배 관련 기자회견의 언론 보도 내용>


성금도 투명하게 나눠줘야 하기 때문에 투명성과 공정성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우리는 성금을 한인 지진피해자들에게 고루 분배하기 위해 점수제를 택했다. 가족수, 기금관계, 긴급성 등으로 점수를 매겨서 등급에 따라 성금을 나눠줬다. 이 점수를 산정하는 일에는 LA 한인 사회 리더들이 참가했다. 참가한 분들은 황성수 목사, 김도안 스님, 차종환 박사, 서정숙 박사 등이었다. 투명성을 위해 성금 배분 내용을 신문에 광고로 알렸다. LA 폭동 당시에는 성금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아주 깔끔하게 진행이 잘 됐다. 이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진 복구 센터를 운영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감사함도 풍성한 경험이었지만 마음에 힘든 부분도 있었다
. 한국에서 정치가들이 몰려와서 봉사가 오히려 방해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봉사를 하다보면 시간 때문에 봉사자들이 식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들 정치가들에게 시간을 내줘야 한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 사실 그들이 오면 마음 속으로 거치적거리는 사람들이 또 왔네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립 서비스는 달콤했지만 이후 후속조치를 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모 국회의원은 한국에서 대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유명 단체의 총재는 지진 피해자를 위해 10만 달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깜깜무소식이었다. 기자회견을 열어 겉치레만 요란히 하고 떠난 한국 정치인들과 단체장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오면 귀찮았다. 10만 달러 약속한 것에 대해 나중에 계속 접촉을 해 추이를 물어봤지만 황당한 말만 계속 들었다. 그때 느낀 게 한국의 많은 리더가 이런 곳에 와서 공수표만 날리고 간다는 것이었다. 저런 분들이 한국에서 리더로 있다는 점에 실망감이 컸다.


미 적십자사가 발행한 노스리지 지진 특집호에 실린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현 월드비전 어린이 합창단)의 모습.


그래도 한국에서 온 어린 천사들의 합창은 지진으로 피폐해져 있던 분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기도 했다. 선명회 합창단(현 월드비전 어린이 합창단)은 지진이 날 무렵 미국 공연 스케쥴이 잡혀 있었다. 지진  발생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던 일정이었기에 취소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하던 상황에서 나는 이 난리에 공연을 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며 공연이 열리도록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지진이 발생한 7일 후인 1994 124일 패서디나 빅 오디토리엄에서 선명회 합창단 공연이 성황리에 열렸고 이 행사에는 지진 피해자들도 초청돼 감동을 나눴다.


나는 어린이들로 구성된 한국 선명회 합창단이 미국인들에게도 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미국적십자사의 도움으로 미국인들의 임시 처소(셸터)에 합창단원을 데리고 가 미니 공연을 하도록 했다.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미국인들은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지진 발생 약 한 달 후에는 내가 이끌었던 한미구호봉사기구(Shalom Community Center)는 지진피해자를 위한 기도회 및 정신건강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많은 피해자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 특히 목사로서 기도회와 아울러 정신적인 부분을 다뤄준 것은 피해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이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내 자신도 노스리지 지진으로인해 작은 피해자였지만 더 큰 피해를 당한 분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노스리지 지진 복구 센터 운영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모든 사람이 연결이 되어 한마음으로 일을 할 때 일이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된다는 것, 과거의 경험을 교훈삼아 새로운 일을 할 경우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미국에서 한인들끼리만 교류를 하는 게 아니라 미 주류 사회와 연계해 함께 일을 할 경우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간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돈으로만 피해당한 이들을 돕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등이다.


                   <미주 한국일보 보도 내용>


당시 함께 봉사했던 분들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 함께 봉사했던 부부를 소개하고 싶다. 김석원 씨, 김광숙 씨 부부는 노스리지 지진의 피해자이면서 지진 직후 3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번갈아가며 센터에서 구호품 접수와 배달 등의 봉사를 했다. 지진 성금 분배를 위해 서류 작업을 묵묵히 도운 박상준 씨도 생각나는 분이다. 또한 십시일반으로 각계각층에서 성금과 생활필수품을 전달해주신 것도 잊을 수 없다. 7세 어린이가 돼지저금통을 털어서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하게 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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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 부활절에 미군 GI 한국 DMZ근무 중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샬롬(평화)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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