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양현승 '커넥티드(Connected)’>는 미국 주류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미국과 한국, 미국과 북한 등을 연결해 사회(커뮤니티) 봉사 활동 및 인권운동을 펼친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이 회고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과거를 다루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미국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연관된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면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연결하며 풀뿌리 운동을 벌였던 양현승 목사님에게 꼭 맞는 표현이라고 판단해 제목을 커넥티드라고 했습니다. 커넥티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고 양 목사님 본인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힘을 얻는 자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회고록은 영웅담이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눈물, 어려운 가운데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 부족한 사람들이 힘을 합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소개하게 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것이 이 회고록의 메시지입니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이명섭 사건, 노스리지 지진, LA 폭동(4.29),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에 깊숙이 연관되어 연약한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던 양현승 목사님의 회고록이 독자들에게 인간다운 삶, 올바른 길, 세겹줄이 나은 이유에 대해 해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고록은 인터뉴스(ICCsports.com)의 박병기 기자가 양현승 목사님의 구술을 받아적은 후에 그것을 기초로 옛 신문과 자료들을 찾아 보충해가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양현승 커넥티드’를 읽으시면서 댓글을 통해, 추천 버튼 클릭을 통해 응답을 해주시면 이 연재를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혹은 글을 읽으시다가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덧글로 주실 때 능력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인터뉴스(ICCsports.com) 편집부]
<이명섭 씨 장례식에는 이명섭 씨 가족과 한인 사회 시민들이 참석했다. 사진에서 하단에 두 어린 아이가 이명섭씨 자녀인 아만다와 스카이다. 아만다는 지금 대학 2학년 생, 스카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스카이를 안고 있는 분은 외할머니, 아만다를 안고 있는 이는 미망인 준꼬 씨다. 아만다 오른쪽은 친할머니, 그 옆은 이명섭 씨 형님, 그리고 양현승 목사가 앉아 있다.>
양현승 목사 구술, 박병기 (인터뉴스) 편집
1. 이명섭 사건(II)
이명섭 씨 사건 관련 재판이 진행되면서 니폰 익스프레스 측의 변호사는 내가 이 재판 과정에서 빠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변호사는 “당사자도 아니고 변호인도 아닌 사건 대책위원장인데 왜 참여하느냐”는 주장을 펼쳤다.
나를 재판에서 배제하려는 그들의 주장도 어느 정도 타당했다. 그러나 제 3자로서 도울 게 분명히 있다고 판단이 들었다. 나는 재판부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한일간의 관계도 잘 알고 이민자로서 미국 생활과 문화의 차이도 잘 알기 때문에 문화해석자(Cultural Interpreter)로 참여하고자 한다.”
준꼬 측 변호사도 나를 배제하려는 분위기에 주춤했지만 나는 계속 문화해석자로서 참여를 강조했다. 결국 상대 변호사도 준꼬 측 변호사도 나의 참여를 받아들였다. 내가 문화해석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굳이 참여하려고 했던 것은, 준꼬 씨와 그의 자녀 스카이, 아만다를 도우려면 당사자와 같은 마음으로 서포트해야 일이 진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어차피 사명보다는 여러 케이스 중 하나로 이 일에 참여한 것이고 다른 업무도 있을 것이기에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참여할 제3자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 재판 과정에서 2년 동안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재판 과정에서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면 변호사가 이 사건에 더욱 신경을 쓰도록 독려했다. 하워드 함 변호사는 다른 케이스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만 집중할 수 없는 것을 잘 알았던 나는 그분이 자기 일 같이 좀 더 많은 시간을 이 재판에 쓰도록 재촉했다. 나의 생각은 적중했다. 이 사건이 4년이 아닌 2년 만에 끝난 것은 이러한 독려와 그것에 대한 함 변호사의 반응이 적절하게 잘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명섭 씨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이 일에 나의 모든 시간을 쏟기로 했다. 특히 1999년 11월10일 LA인근 토랜스시에 있는 니폰익스프레스사 앞에서 고인의 넋을 기리는 노제에서 그러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사건이 점점 큰 이슈가 되는 분위기에서 이명섭 씨를 추모하는 노제가 열렸고 100명 이상이 참여했다. 나는 이 노제의 마지막 순서로 이명섭씨가 살았던 햇수(39세)만큼 징을 치는 순서를 마련했는데 첫 번째 징으로 준꼬씨가 남편을 추모토록 했다. 나와 대책위 관계자들이 징을 치다가 마지막 39번째는 이명섭 씨의 딸인 아만다(송원)가 징을 치도록 했다. 아만다에게 아빠를 추모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빠가 왜 이렇게 됐는가를 기억하라는 뜻에서 징을 치도록 했다.
당시 니폰 익스프레스는 직원들에게 이명섭 씨와 관련된 그 어떤 행사에도 참여하지 말 것을 당부했는데 그럼에도 몇몇 직원들이 이 노제에 참여했다. 나는 그들이 회사 내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며 이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에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이는 이명섭씨가 직원들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긴 재판 과정에 들어갔고 결국 상호협상을 통해 니폰 익스프레스는 정식으로 사과하고 준꼬 씨는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남편이 자살한 지 2년 만에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조건으로 합의가 되었는지를 잘 알지만 나는 이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서약했기에 밝힐 수는 없다. 당시 모 한인언론이 니폰 익스프레스사가 수백만 달러 배상 합의를 했다고 보도했지만 구체적인 액수는 당사자와 변호인 그리고 나만 알고 있고 외부로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기사는 추측 보도였을 뿐이다.
어쨌든 이 인종차별 민사소송에서 양측은 “금전적 요소가 포함된 법정 밖 합의”를 이끌어 냈다. 유족과 니폰 익스프레스 측은 각 언론사에 공동발표문을 보냈는데 여기에는 “니폰사가 유감과 또다시 애도의 뜻을 전하는 편지를 유족에게 전달했으며 쌍방은 이번 사안을 해결하는데 합의했다”고 씌어 있었다. 1999년 10월29일 자살 사건이 발생한 후 2년 만인 2001년 11월9일 사건이 종결됐다.
나는 준꼬 씨가 니폰익스프레스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전문재정 설계가에 맡겨 가족들이 적절히 쓸 수 있도록 챙겼다.
어떤 이는 내가 이 사건에 개입해 얻는 것이 있을 것으로 오해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어떤 사적인 유익을 취한다면 나의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오히려 내 돈을 써가면서 이 일에 참여했다. 내 아내는 내가 이 일에 대가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내조한 보이지 않게 도운 내조자이기도 했다. 가끔은 재판 관계로 내 아내가 준꼬 씨의 두 아이를 돌봐주기도 했다.
준꼬 씨 가족이 어떻게든 독립해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게 내가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가족을 한인 사회 집회와 연계해서 동원되지 않게 하는데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만약 이들이 어떤 목적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계속 노출되면 고통의 늪에 빠져서 또 다른 고통이 이어질 것을 나는 염려했다. 고인을 추모하면서 힘차게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준꼬 씨 가족을 동원하려고 했던 사람들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 가족이 조용히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오해도 있었을 것이다. ‘양 목사가 이 가족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렇게 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법정 투쟁을 하면서 이 가족을 위해 배려(?) 했던 것 중 하나는 준꼬 씨가 아이들을 가능한 동행토록 하게 한 것이다.
미망인은 아이들을 친지에게 맡겨두고 재판과정에 동참하길 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빠를 위해 진상을 파악하고 투쟁할 때 자신들도 함께 했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었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한 가지 받은 보상이 있다. 바로 해마다 연말이 되면 받는 아만다와 스카이가 자란 모습이 있는 성탄카드다. 사건이 종결된 후 부터 준꼬 씨 가족을 8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카드를 통해 보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 됐다. 나는 몇 년 전에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친히 나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올해는(이 글을 작성한 시점인 2009년) 이명섭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되는 해다. 나는 준꼬 씨 가족이 그동안 독립해서 힘차게 일어서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만나지 않았지만 10년을 기념해서 이명섭 씨의 묘소에 바칠 꽃을 갖고 아무 연락 없이 그 가족을 찾아갔다. 내가 집을 찾아 현관문을 노크하자 준꼬 씨가 놀란 표정과 함께 너무나 반가워하며 나를 맞아줬다. 우리의 공통 관심사는 역시 아이들이었다. 아들 스카이는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했다. 준꼬 씨와 나는 스카이가 매일 걸어다니는 학교를 함께 찾았다.
아이는 보이스카우트 훈련 중에 있었는데 담당 선생님의 양해를 구해 스카이와 잠깐 만나 대화를 했다. 딸 아만다는 대학 2학년 생이라고 했는데 방문했을 때 마침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전화로 대화를 나눴다. 이날 방문에서 나는 준꼬 씨가 한인 사회를 대표한 전 한인회장 서영석 회장(하기환 전 회장은 부재 중이었음)과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서 회장과 전화를 하는데 준꼬 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준꼬 씨와 헤어진 후 나는 하워드 함 변호사에게도 연락을 해서 준꼬 씨가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려줬다.
당시 상황을 돌아보니 참 많은 사람이 준꼬 씨 가족을 도왔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이 터졌을 때 LA 한인 사회 단체장들과 LA 한인 언론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상세히 다뤄 피해 가족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한국 네티즌들의 호응에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국제 사회도 이 사건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이명섭 공식 웹사이트를 인터뉴스 커뮤니케이션의 도움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알렸다. 네티즌들의 보이지 않는 응원과 격려에서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현장에서 내 목소리를 녹음해 네티즌들에게 음성으로 호소한 후에 많은 격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LA 타임스의 한국계 기자인 카니 강 씨(사진 왼쪽)가 이 사건을 심층취재해 다뤄 여론형성에 큰 도움을 줬다. 지금은 은퇴한 강 기자는 장지에 갔던 상황부터 순간순간 보도를 잘 해줘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 언론인 이다.
한국 언론도 이 사건과 재판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한인 사회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남가주 한인노동상담소의 홍순형 소장은 내가 TV 인터뷰를 나가면 시나리오까지 준비하는 열성을 보였고, LA 한인회 두 회장(서영석, 하기환)도 열심히 참여해 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나는 이 사건의 대책위원장이 됐을 때 많은 갈등을 했다. 이 일을 맡으면 모든 것을 올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했던 다른 일이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1994년 LA 인근 노스리지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 내가 살던 집도 영향을 받아 개스가 끊어지고, 집안에 있던 물건이 떨어지는 등 집안이 엉망이 됐다. 그런데 나는 곧바로 지진 피해자를 도와주고자 집도 정리하지 못한 채 집문을 나섰다. 가족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은 그러한 나를 잘 이해해줬다. 내 딸 하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더 많은 사람을 도와주러 나갔기 때문에 괜찮아요.”
10년 전 나는 왜 이명섭 씨 사건의 대책위원장이 됐을까? 나는 ‘이 일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였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응어리진, 해결 안 된 문제의 표출이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던 것 같다. [양현승 커넥티드 계속]
지난 글 읽기
2009/10/29 - [연재/양현승 '커넥티드'] - [양현승 커넥티드(1)] 이명섭 사건 10주년(상)
양현승 목사는...
1946년에 태어나 1978년 까지는 예수를 안 믿었고 소위 '예수쟁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란 말이 가장 싫었다가 1978년 부활절에 미군 GI로 한국 DMZ근무 중 미 육군 수통의 물로 북한병사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다.
이후에도 교회를 들락날락하다가 1980년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고통했던 그는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7년 후인 1987년 미국 연합 감리 교회(UMC)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양 목사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 봉사 활동, 인권운동에 참여했다.
지난 36년 동안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커뮤니티 봉사가로 꾸준히 활발한 봉사를 한 그는 2002년에 미국적십자사 '올해의 봉사자상'을 수상했다. 가정과 교회와 커뮤니티를 한 몸으로 알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서 평상심 유지를 하나님의 열정으로 해 나갈 때 샬롬(평화)을 누린다는 것이 양 목사의 삶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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