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22 - [추억의 인터뷰] 코비 브라이언트 신인 시절, 한국말도 했다.
2009/06/15 - [BK Column] - 코비가 조던처럼 챔프 반지 6개 받으려면 필요한 것
■ 첫 2년 동안 적응기간
브라이언트는 '수퍼스타' 후보였지만 첫 2년 동안은 벤치 선수로서 뛰었다. 신인 시즌에 8.2득점을 기록했던 그는 2년차 시절에도 8.7득점에 그쳤다. 신인 시즌이었던 1997년, 그는 올스타전에서 슬램덩크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화려한 플레이로 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브라이언트는 1998년 올스타전에서 서부 컨퍼런스 주전으로 선발됐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어린 올스타 주전으로 기록됐다.
에디 존스, 닉 밴 엑셀의 백업 가드로 뛰었던 브라이언트는 NBA 진출 후 세 번째가 되는 시즌에 주전 자리를 꿰찼다. 레이커스는 존스, 밴 엑셀이 떠난 후라 가드 자리가 비었고 자연스럽게 브라이언트를 주전 가드로 세울 수 있었다. 오닐-브라이언트 콤비가 레이커스에 챔피언십을 가져줄 것이라는 믿음은 코비의 NBA 생활 첫 3년 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4전 전패를 당하고 탈락했다.
브라이언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를 꼽는다면 필 잭슨일 것이다. 잭슨 감독은 1999-2000시즌에 레이커스 감독이 됐다. 시카고 불스를 '왕조'로 만들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들고온 잭슨 감독은 첫 시즌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브라이언트와 오닐은 그러나 생각이 달랐다. 3년 동안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들은 잭슨 감독 아래서 당장 우승하기를 원했다. 이 두 선수의 각오는 남달랐다. 그리고 결과는 잭슨 감독도 놀라워한 우승이었다. 잭슨 감독 부임 후 첫 시즌에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NBA 4년차였던 브라이언트는 22.5득점, 6.3리바운드, 4.9어시스트로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마침내 레이커스의 시대가 열렸다.
브라이언트는 매년 성장해 2000-01시즌에는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즌에 28.5득점, 5.8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한 브라이언트는 MVP가 될 수 있는 개인성적을 냈지만 팀 내 MVP도 될 수 없었기에 리그 MVP 선정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이커스는 잭슨 감독 체제하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지만 브라이언트와 오닐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레이커스는 2001-02시즌에도 챔피언이 된 레이커스는 3년 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브라이언트는 그러나 여전히 2인자였다.
브라이언트의 기량은 더욱 향상됐다. 2002-03시즌에 그는 평균 30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9경기 연속 40득점+를 기록했다. 2003년 2월 한 달 동안 브라이언트의 평균 득점은 40.6득점이었다. 브라이언트가 떴지만 레이커스는 4연패를 이루지 못했다.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 시리즈에서 스퍼스에 2승4패로 무릎을 꿇었던 것. LA 언론은 "브라이언트가 잘하는 것은 레이커스에 독약"이라는 식으로 모든 책임을 브라이언트에 떠넘겼다.
브라이언트는 2003-04시즌이 시작하기 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다. 미 전국 언론은 이 소식을 연일 중계방송 하듯이 전했다. 농구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브라이언트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다. 깨끗한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브라이언트와 오닐의 신경전은 이 사건으로 더욱 첨예해졌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성폭행 고소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오닐이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고 분개했다.
코비는 트레이닝 캠프가 시작하기 전 잭슨 감독에게 "오닐이 언론에서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코비와 친했던 트레이너인 개리 비티는 오닐에 접근하지 못했고 오닐과 친했던 칩 셰이퍼 트레이너는 코비의 테이핑을 돕지 못했을 정도로 두 선수는 앙숙이었다. 또한 어떤 기자가 오닐과 친하면 그는 브라이언트와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레이커스는 개리 페이튼, 칼 말론을 영입하고도 두 선수의 감정싸움으로 인해 NBA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혼란스러운 시즌이 끝나고 오닐은 마이애미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잭슨 감독도 떠났다. 잭슨 감독은 떠나면서 코비를 비난한 내용을 실은 '마지막 시즌'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잭슨 감독의 코비를 향한 애증이 잘 드러났다. 잭슨 감독의 빈자리를 루디 탐자노비치가 채웠지만 그는 시즌 중에 돌연 사임했다. 혼란이 이어졌고 레이커스는 리그의 웃음거리가 됐다. 코비는 팀 내 1인자가 됐지만 아무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이커스가 계속 헤매자 잭슨 감독은 2005-06시즌에 다시 LA로 돌아왔다. 이 시즌에 코비는 무려 35.4득점, 5.3리바운드, 4.5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범죄자' '이기주의자' 이미지가 강한 그를 MVP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잭슨 감독 재부임 후 첫 2년은 평범한 시즌이었다. 레이커스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서 피닉스 선스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2007-08시즌이 시작하면서 코비는 '팀 플레이어'가 됐다. 앤드류 바이넘이 급성장하고 파우 가솔을 영입하자 코비를 중심으로 한 레이커스는 서부 최강이 됐다. 코비는 데뷔 후 줄곧 레이커스 유니폼만 입었다. 그의 영욕의 세월은 다른 사람의 인생과 크게 다르다. 독특한 인생을 보낸 그가 생애 첫 MVP 트로피를 받게 됐다. 2007-08시즌에 코비는 MVP로 선정됐고 레이커스는 오랜만에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레이커스는 그러나 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완패했다.
■ 코비 중심의 왕조
코비와 레이커스는 2008-09시즌에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레이커스는 시즌을 65승17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마쳤고 코비는 MVP 투표에서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에 이은 2위에 올랐다. 레이커스는 유타 재즈, 휴스턴 로키츠, 덴버 너기츠를 차례로 누르고 NBA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고 결승에서 올랜도 매직을 눌러 실로 오랜만에 NBA 챔피언이 됐다. 브라이언트는 NBA 챔프 결정전 MVP로 뽑혔다. 이는 코비의 네 번째 챔피언 등극이었고 오닐이 떠난 후 첫 번째 챔피언십이었다.
[글/블로그 ICCsports.com의 밝은터 사진/ICCspo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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