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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 Column/추억의 칼럼

[추억의 칼럼] 크리스마스에 생각해 보는 인내

by 밝은터_NJT 2009.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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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 밝은터가 미주 중앙일보 스포츠 면에 글입니다.


분주한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각종 행사와 모임이 있었고 이제 세밑의 중요한 행사가 끝이 났다. 너무 바쁜 나머지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되새겨볼 여유가 없었던 같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다. 석가탄신일이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인 것처럼 말이다.

기자는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교회에서 말하는 여러 내용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크리스마스 하면 '인내' 생각난다. 화려하지 않은 곳에서 평범한 부모 밑에서 학정의 시대에 태어난 예수는 '인내' 화신이었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30 동안 평범하게 자랐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까지 평범한 탄생과 평범한 30 동안의 삶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역사에서 기록된 예수의 30 이후 활동을 보면 이전 30 동안 어떻게 조용히 인내할 있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IAAF Golden League

 현대와 초현대를 사는 우리는 분초로 승부를 하는 세상에 있다. 누가 1 빠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는다. 올림픽 육상 100m 경기에 사람들은 열광할까. 바로 0.1초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100m 9초대에 달리는 선수와 10초대에 달리는 선수는 엄청난 수준 차이가 있다. 1초에 따라 세계적인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가 갈린다.

야구에서도 90마일의 공을 던지는 선수와 100마일을 던지는 선수의 차이는 크다. 90마일이란 시속 90마일을 의미한다. 100마일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1초로 계산하면 90마일은 0.025마일이 되고 100마일은 0.028마일이 된다. 거의 차이가 없다고 있다. 1 날아가는 거리가 0.003마일밖에 차이 나지 않음에도 우리는 이를 크게 다른 것으로 여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빠른 것이 좋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30년을 기다린 예수의 청년기의 삶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신의 인내를 값지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화적 컨텍스트에 우리는 있다. '인내' 이해함은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힘들다. '인내' 개인적인 '특별한' 노력 또는 신의 간섭이 필요한 부분이다.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기적을 일으킬 능력을 갖췄던 예수가 30 동안 이렇다 활동을 하지 않았던 일은 평범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없다. 그게 바로 예수 탄생의 신비이다.

 스포츠 분야에도 인내를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 있다. LA 다저스 단장인 디포데스타(아래 사진. 밝은터가 찍은 것입니다)가 명이다. 그가 다저스 단장으로 재직했을 로두카를 트레이드한 일은 LA 지역 언론과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당시 LA 타임스 기자들이 디포데스타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을 그는 로두카 트레이드의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힌트도 주지 않았다. 로두카 트레이드는 LA 언론이 디포데스타를 다저스에서 쫓아낼 적당한 '꺼리'였다.


팬들의 감정을 이용해 LA 타임스 기자들은 디포데스타의 구단 운영을 난도질했다. 2007 12 현재 로두카는 어떤 선수로 여겨지나. 다저스에서 플로리다로 트레이드됐던 당시 로두카는 '스테로이드 공급의 중간책'이었다는 것이 미첼 리포트에서 드러났다. 다저스 수뇌부는 당시 로두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디포데스타가 로두카에 대해 한마디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랬다. 대단한 인내심이다. 심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부 LA 언론 기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박으라고 외쳐댔던 유대인들과 비슷했고 디포데스타는 십자가 상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와 비슷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흥분하는 기독교인들이 없었으면 한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공의를 위해 인내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인생의 승리자다. 어쩌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할 있다. 그러나 사후 세계에서는 분명 다른 대접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밝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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