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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추억의 스페셜

[추억의 스페셜] 대만 특급 MLB 도전기

by 밝은터_NJT 2009.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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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당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는 대만 선수는 6명이 있었습니다. ICCsports.com은 빅리그라는 메이저리그 전문 잡지를 만들었는데 2002년 2월호에 아래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내용과 2009년 현재 상황을 살펴봅니다.

 

글: 유정훈 기자

사진: ICCsports.com, PicApp, Flickr

 

Taiwanese Professional Baseball Game
Taiwanese Professional Baseball Game by Nekonomist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대만 6인방 `우리가 간다`


  한때 리틀 야구의 절대강자. 그러나 위로 올라 가면서 점점 힘이 떨어져 세계 제패는 커녕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한국과 일본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 대만 야구의 현주소다. 이러한 양상은 자국 출신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 성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은 박찬호, 김병현 이라는 걸출한 빅리거를 내놓았고 일본도
진주만 공습에 비견되는 폭풍을 몰고 왔던 노모 히데오에 이어 지난해 또 한번 미대륙을 뒤흔들었던 이치로 스즈키에 이르기까지 역시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2002년까지 대만 야구는 메이저리거는 물론이고 마이너리그 최상위 레벨인 트리플A에서 뛴 선수 한명 배출하지 못한 상태다. `대만산 빅리거`를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1990년대 중반 박찬호와 노모의 성공사례는 메이저리그 각 구단들로 하여금 아시아 야구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이후 그들은 한국의 고교 및 대학 선수들과 일본의 프로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야구강국인 대만으로까지 눈을 돌리게 됐다.


   박찬호와 노모로 큰 재미를 봤던 LA 다저스는 발빠르게 움직여 대만 유망주 시장 개척에 다른 구단들 보다 빨리 나섰고 그 결과로 미래 다저스 좌익수감 첸친펭과 장차 제1선발감인 쿠오홍친를 영입 할 수 있었다. 다저스와 같은 지구의 경쟁팀 콜로라도 로키스도 첸의 성공에 자극 받아 다저스가 선점한 대만 시장에 뛰어들어 그들의 미래 에이스감인 차오친후이를 그리고 최근엔 로칭룽이라는 대어를 낚는데 성공했다.

 또한 뒤늦게 대만 스카우트 시장에 뛰어들었던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도 다저스와 로키스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각각 왕치엔밍과 후앙준춘이라는 준척급 유망주를 건질 수 있었다. 이들 대만산 꿈나무들은 과연 빅리거가 되고 나아가 올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할 수 있을까? ICCsports.com은 대만출신 유망주들을 조명해 보고 그들의 미래를 전망해 보았다.

첸친펭(사진 ICCsports.com) 

 

#1 빅리그에서도 통할 `슬러거` 첸친펭  

 

리틀야구 세계 챔피언

 

첸친펭, 그는 이미 야구에서 세계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경험을 갖고 있다. 13살이던 1990년 첸은 펜실베니아주 윌리엄스포트에서 열렸던 리틀리그 월드시리즈 챔피언전에서 대만대표팀 1번 타자이자 중견수로 활약하며 조국 대만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미 자신이 `될성부를 떡잎`임을 보여줬던 것.

   
10대 후반때 부터 대만 국가대표팀의 주축선수였던 그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정교하면서도 폭발적인 타격으로 메이저리그 각 구단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98 12월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에서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였던 한국의 박찬호를 상대로 홈런을 뽑아내면서 그의 주가는 더욱 올라갔다.     

   
결국 첸은 1999 1 5(미국시간) 아시아 진출의 선두주자 다저스와 68만달러에 계약을 맺고 탄흐신민(1974~75,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싱글A 팀에서 뛰었던 투수)에 이어 대만 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미 프로야구 무대에 진출하는 선수가 됐다.  

 

MVP! MVP!

 

대만 출신 6인방중 가장 빠른 99년 미국으로 건너간 첸친펭은 데뷔 첫해 엄청난 활약으로 대만선수들의 미국 진출에 있어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상위 레벨 싱글A팀인 캘리포니아리그 샌버나디노 스탬피드에서 좌익수로 뛰었던 그는 131경기에 출전 타율 .316, 31홈런, 123타점, 31도루, 출루율 .404,  장타율 .580를 기록하며 ‘빅히트’를 쳤다. 그는 리그 최초의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한 선수가 됐으며 타점 공동 1, 홈런 2, 장타율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홈런과 타점에서 또한 팀 기록을 세웠으며 그 해 리그 전체에서 가장 홈런을 날리기 어려웠던 스탬피드 구장에서만 1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이러한 눈부신 성과는 그를 리그 ‘올해의 선수(99)’ 및 다저스의 ‘올해 마이너리그 선수(99)’로 만들었으며 샌버나디노는 그의 활약을 기려 리치 도어(25) 및 켄 그리피 주니어(24)에 이어 첸친펭의 백넘버 43번을 영구결번 시키기까지 했다. 그리고 최고의 마이너리그 야구 전문지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첸을 2000년 다저스 유망주 순위 1, 마이너리그 유망주 톱100에서 전체 14위에 올려놓으며 그를 마이너리그 엘리트로 인정했다.

 

MDP(Most Disappointing Player)

    

99년 시즌이 끝난 후 전문가들은 첸이 더블A 무대에서도 첫해 못지 않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고 빠르면 2000년 중반쯤 다저 스테이디엄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년차 ‘징크스’ 때문이었을까?

  
더블A 텍사스리그 샌앤토니오 미션스로 올라간 첸은 2000 9월쯤엔 대만 최초의 빅리거가 될 것이라던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반짝했던 4월을 끝으로 5월부터 시즌 종료시까지 길고 긴 슬럼프를 겪으며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가장 눈부신 선수에서 가장 실망스런 선수로 전락해버린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진짜 유망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그의 2000년 시즌 더블A에서의 기록은 133경기에서 타율 .277, 67타점, 6홈런, 23도루, 출루율 .355 그리고 장타율 .376으로 타율, 홈런, 타점, 출루율 및 장타율에서 전년 대비 각각 .039, 25, 56, .049, .201씩 현저한 기록의 저하를 보였으며 도루는 23개를 기록 전년도(31) 못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도루 실패가 15개로 전년도(7)에 비해 훨씬 많아 결과적으로 역시 저조한 성적이었다.

   
저명한 마이너리그 전문가인 잔 식켈스씨는 그의 저서 `2001 마이너리그 스카우팅노트북`에서 첸의 부진의 원인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것(puzzling)’이라고 평가하면서 그가 아시아계 공동체가 자리를 잡고있는 캘리포니아와는 분위기가 매우 다른 텍사스리그의 샌앤토니오에서 지내게 되면서 겪었을 문화충격(culture shock)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진단했다.

   
2000년 시즌 후 첸은 오른쪽 어깨의 손상된 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이는 시즌 중 어깨가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경기를 했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것이 부진의 가장 큰 이유로 여겨진다.

 

돌아온 첸

 

이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2001년 시즌 그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높았는데,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과 파워 때문. BA 2001년초 첸을 전년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선수인 강속구 투수 벤 디긴스에 이어 다저스 유망주 랭킹 2위에 올렸으며,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다저스 팜에서 가장 ‘천부적인(natural)’ 야구선수이자 최고의 파워를 지닌 그가 최초의 대만출신 메이저리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건강을 되찾은 첸은 2001년 시즌 더욱 성숙해진 모습과 활약으로 이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2001년 상위 레벨 싱글A 플로리다 스테이트리그 베로비치 다저스에서 시즌을 시작한 첸은 62경기에 출장, 타율 .268, 5홈런, 41타점, 28볼넷, 56삼진, 출루율 .359, 장타율 .421을 기록하며 `몸만들기`를 끝냈으며 더블A 서던리그 잭슨빌 선스로 올라가서는 다시 폭발적인 타격을 선보이며 99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그때보다 더욱 무서운 타자였다.  

   
66경기에서 타율 .313, 17홈런 50타점 출루율 .422, 장타율 .629을 기록한 첸은 후반기 팀은 물론이고 리그 최고의 타자였다. 놀라움에서 의혹의 대상으로 추락했던 그가 다시 주목받는 선수로 떠오른 것.

 

대만 최초의 빅리거

 

2002년 시즌을 앞두고 발표된 다저스 유망주 순위에서 베이스볼 아메리카지는 첸을 투수 리카르로 로드리게스에 이어 전체 2, 타자들 중 1위로 평가하며 그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2001시즌 더블A에서 그가 건강했을 때 어떠한 타자인지를 보여줬으며 건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그가 걸어갈 길을 예상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첸은 중심타선에 설 만한 파워와 선구안을 갖고 있으며 평균 이상의 주루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평범한 어깨는 그의 포지션을 좌익수로 제한하고 있다. 개리 셰필드가 계속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1루수와 좌익수 자리를 번갈아가며 맡게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올시즌 가장 좋아할 영화제목은? 그건 아마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가 될 것 같다.

 

2009시즌에 쓰는 후기(by 밝은터)
첸은 유정훈 기자의 기사가 나갔던 2002년시즌에 대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거가 됐다. 첸은 그해 3경기에 출전,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첫 대만 출신 메이저리거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첸은 이후 트리플A와 다저스를 오가는 선수가 됐다. 이상하게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다. 2002, 2003, 2004, 2005년에 그는 메이저리그 19경기에 뛰었고 대부분 시간을 트리플A팀이 있는 라스베가스에서 보냈다. 

 

2005시즌이 끝나고 첸과 다저스의 계약은 만료됐다. 그는 곧바로 대만으로 돌아갔다. 대만프로야구리그의 라 뉴 베어스라는 팀에서 뛰게 된 첸은 첫 시즌 결승 시리즈 MVP로 선정되며 성공적인 대만프로야구 데뷔를 했다. 아시아 야구 대회에서 맹활을 한 첸에 대해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가 영입에 관심을 보였고 오릭스 버팔로스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였으나 첸은 대만에 머물기로 했다. 2009시즌까지 첸의 대만에서 성적은 305경기 출전, 타율 3할4푼4리, 홈런 81개, 273타점, 도루 37개다.  

 

쿠오홍치(궈홍치) 사진:ICCsports.com

#2  미래 다저스의 에이스감 `좌완 박찬호` 쿠오홍친

 

   ‘파워 투수의 전형’


   첸친펭이 99 시즌 초반 대활약을 펼치자 메이저리그 각 구단 스카우트들의 눈길은 더욱 대만으로 쏠렸다. 당시 대만 유망주들 가운데 가장 관심을 모았던 선수는 바로 좌완 쿠오홍친(한국에서는 궈홍친으로 알려짐). 95마일이 넘는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좌완 투수를 보며 군침을 삼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다저스는 물론이고 콜로라드 로키스, 뉴욕 메츠등이 그의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다저스의 승리. 시장 개척의 선발주자 다저스는 대만 최고의 좌완 유망주였던 쿠오에게 다저스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 대만 유망주 넘버 1 2를 독차지 했다.


   99 6 125만달러를 받고 다저스와 계약했던 쿠오홍친은 좌완이면서 시속 95~97마일의 빠른볼을 던질 수 있는 파워 투수의 전형이다. 그의 이러한 능력치에 높은 점수를 준 베이스볼 아메리카지는 프로야구 경험이 없던 그를 2000년 다저스 유망주 랭킹에서 3위에 올리기도 했다.


   쿠오는 미 프로야구 데뷔전에서 그가 어떤 선수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미 프로야구 1년 선배 첸이 큰 족적을 남겼던 샌버나디노에서 시즌을 시작한 그는 선발 첫등판에서 3이닝 동안 9명의 타자를 맞아 무안타 무볼넷에 7명을 삼진으로 처리하며 타자들을 압도해버렸다.


   그러나 경기 중 왼쪽 팔꿈치에 통증을 느꼈던 쿠오는 3이닝을 끝으로 첫 등판을 끝냈고 그것으로 그의 시즌은 마감됐다. 경기 후 검진에서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던 쿠오는 그해 4월 프랭크 조브 박사로 부터 팔꿈치 수술(일명 타미 존 수술)을 받았다.


   확대 스프링 캠프에서 재활과정을 거친 쿠오는 수술 후 1년 이상이 경과한 지난 6월 루키레벨인 걸프코스트리그에서 다시 마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7경기에 등판했던 그는 19이닝을 던져 승패 없이 13피안타, 4볼넷, 21탈삼진을 기록하며 이상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아직 팔꿈치가 완전하지 않아 구단에서는 그의 등판횟수와 투구수를 엄격하게 조절했다.   


탐 시버 계열

 

   쿠오는 빅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패스트볼을 갖고 있다. 좌완인 그의 97마일 짜리 패스트볼은 가장 큰 무기다. 베이스볼 아메리카지는 유연한 상체와 단단하고 강한 하체등 파워 투수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갖춘 그를 탐 시버에 비유했다. 이는 그가 박찬호의 초창기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투수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 쿠오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패스트볼 뿐이다. 그가 상위레벨 나아가 빅리그에서 뛸 수 있으려면 이와 함께 확실한 변화구 하나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패스트볼의 제구력과 커브와 체인지업의 구사력을 향상시킨다면 그는 장차 다저스 에이스로도 성장할 수 있는 재원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타고난 능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수술 후 경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앞으로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며 부상 재발의 우려로 변화구에 대한 연습도 미뤄 질 수밖에 없어 그의 빅리그 입성은 2003년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2002 시즌을 하이 싱글A 레벨인 플로리다 스테이트리그에서 보내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빅리거 투수는? 그건 아마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맷 모리스일 것 같다.

 

2009시즌에 쓰는 후기(by 밝은터)
2003년에도 팔꿈치 수술을 받은 쿠오가 다시 피칭을 시작한 것은 2005년이다. 위 기사가 작성된 지 3년 만에 쿠오는 제대로 피칭을 할 수 있었다. 2005시즌에 그는 마이너리그 총 28경기에 등판했고 2005년 9월2일 마침내 메이저리거가 됐다. 2006시즌을 메이저리거로서 시작한 쿠오는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을 보여 트리플A로 내려보내졌다. 첸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후 다저스와 트리플A를 오고갔던 쿠오는 2006년 9월8일 생애 첫 메이저리그 선발 등판을 이뤘다. 선발 등판 경기에서 쿠오는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이후 그는 선발로 등판한 경기에서 평균 자책점 2.59를 기록했다. 

2007시즌을 앞둔 스프링캠프에서 쿠오는 부상을 당했다. 이것이 화근이 돼 2007시즌도 1승4패, 평균 자책점 7.42로 부진했다. 2008시즌을 앞두고 다시 팔꿈치 수술을 받았던 쿠오는 이 시즌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갈 것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조 토리 다저스 감독은 그러나 그를 롱 릴리프로 기용하길 원했고 그 자리에서 쿠오는 대성공을 거뒀다. 5승3패, 평균 자책점 2.14의 빼어난 성적을 낸 것이다. 쿠오는 2009시즌에도 역시 팔꿈치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결장했지만 35경기에 구원등판, 평균 자책점 3.00에 3승무패로 무사히(?) 시즌을 마쳤다. 쿠오는 계속된 팔꿈치 부상에도 90마일 중반대의 빠른 공을 던졌고 슬라이더의 각이 일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또한 2009시즌에는 커맨드가 크게 향상했다는 칭찬도 있었다.  

 

미니 인터뷰: 다저스 아시아 부서의 대만인 대니씨.

 

  2002년 쿠오를 만나기 위해 다저스 경기장을 찾은 기자는 다저스 구단 아시아부의 대만인 대니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저스 2002년 첫 워크아웃(동계훈련)에 참가한 쿠오는 동료들과 열심히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기자는 먼저 쿠오의 현재 몸상태에 대한 질문을 했다. 대니씨는 “상태가 아주 좋다. 완벽히 회복되고 있는데 전과 같은 스피드를 다시 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과 같은 스피드란 97마일에 이르는 강속구를 말한다.


   대만에서의 쿠오와 첸친펑에 대한 인기를 물어 보자 대니씨는 “생각 보다 관심이 높다”고 말했는데 ‘박찬호의 인기는 한국에서 마이클 조던 수준’이라는 기자의 말에 “그 정도는 아니지만 대만 프로야구 승부조작 스캔들(scandal)로 야구팬들의 관심이 미국으로 쏠리고 있고 선수들도 대만 야구가 아닌 메이저리그 행을 꿈꾸고 있다”고 답변했다.

 캐치볼 중이던 쿠오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잠시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은 후 팀 동료가 영어로 질문을 하자 재치 있는 답변을 한 쿠오는 영어 구사 능력도 뛰어나다고 한다. 대니씨는 “쿠오는 동료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영어도 잘 하고 유머스럽다. 그리고 붙임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취재: 박병기(밝은터)>

 

Colorado Rockies vs. Los Angeles Dodgers

#3 `대만 특급` 차오친후이

 

  콜로라도 로키스는 같은 지구의 라이벌 다저스가 박찬호, 노모에 이어 대만의 첸친펭에 이르기까지 극동 지역 스카우팅에서 수확을 거둔 것에 자극 받아 대만시장 공략에 나섰고 좌완특급 쿠오에게 눈독을 들였으나 영입 경쟁에서 다저스에게 밀리고 말았다. 그러나 로키스는 쿠오와 쌍벽을 이루던 우완 유망주 차오친후이 `포섭(?)`에 전력을 다했고 99 10월 결국 220만달러라는 당시 구단 신인 계약금 최고액을 지불하면서 그를 붙잡을 수 있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차오는 99 8월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만대표로 출전하여 3경기에서 23이닝을 던져 10안타 무실점에 삼진을 30개나 잡아내는 빛나는 피칭으로 3승을 올렸었고, 이어 서울에서 열렸던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1안타 15탈삼진의 완봉승 경기를 포함 11이닝 3안타 1볼넷 19탈삼진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로키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그 각 구단들의 스카우터들을 매료시켰다.


   베이스볼 아메리카지가 마이너리그 기록이 전혀 없었던 그를 2000 시즌 로키스 유망주 순위 전체 8위에 올려 놓았을 정도로 차오는 시작부터 큰 기대를 받았고 마운드에서의 좋은 성과로 이에 부응했다

 

블루 칩

 

   로키스의 투자는 그대로 적중했다. 2000 시즌 `큰형님` 첸친펭이 부진에 빠진 가운데 대만 출신 마이너리거들 중 선두주자는 단연 차오였다. 극단적으로 빠른 볼에만 의존하는 스타일인 쿠오와는 달리 최고 96마일의 빠른볼에다 메이저리그 수준의 슬라이더와 커브까지 던질 수 있는 그에게 미들 싱글A 레벨 무대는 너무나 좁았다.


   사우스 어틀랜틱리그 애쉬빌 투어리스트 소속으로 24경기에 등판했던 차오는 24경기에 선발등판, 145이닝을 던져 118, 방어율 2.73 볼넷 40, 탈삼진 187개의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다. 탈삼진 부문 리그 공동 2위 및 방어율 부문 4위에 올랐던 그는 리그 올해의 투수(2000)로 뽑히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자 그는 어느 듯 라키스의 최고 유망주로 승격했다.


   먼저 미 스포츠 전문지인 `더 스포팅 뉴스(The Sporting News)`와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인 ESPN은 차오를 구단내 최고 유망주로 꼽았다. 마이너리그 전문가인 식켈스는 ESPN에 기고한 로키스 마이너리그 리포트에서 차오에 대해 "만약 당신이 투수 유망주의 원형을 원한다면 차오가 바로 그런 선수다. 그는 강속구에다 훌륭한 변화구까지 가지고 있다. 그는 프로 첫시즌 187/40의 탈삼진/볼넷 비율을 기록했다."며 구질과 훌륭한 적응력 등을 들며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라키스 최고 유망주로 평가했다.


   이어 시즌 전 마이너리그 기록이 전혀 없었던 차오를 2000 시즌 로키스 유망주 순위 전체 8위에 올려놓으며 기대감을 나타냈던 베이스볼 위클리 역시 그를 2001년 구단 유망주 순위에서 당당 1위로 선정하며 장차 빅리그 스타로의 성장을 예고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가 매년 발표하는 이 팀별 유망주 톱10 랭킹은 메이저리그 각 구단의 스카우팅 및 선수 육성 담당자들의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유망주를 평가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될 정도로 높은 신뢰도를 자랑한다. 아시아 출신으로 구단별 랭킹에서 1위에 오른것은 2000년 다저스 유망주 랭킹에서 1위에 올랐던 같은 대만의 첸친펭에 이어 두 번째였다. 한국출신으로는 박찬호와 최희섭(시카고 컵스)이 각각 96년과 2000년 구단 유망주 랭킹 2위에 올랐던 것이 최고 순위.

 

차오는 장래 에이스감

 

   다음은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차오에 대한 코멘트;

 

   “차오는 프로 첫 등판 때 부터 타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2000년 시즌 그가 이룩했던 ‘업적’ 가운데 퓨처스 게임 대표, 소속팀 애쉬빌의 팀 MVP, 리그 정규시즌 및 포스트시즌 올스타 그리고 리그 그해의 투수 선정이 있다.


   그는 확실한 강속구 투수이다. 그의 직구는 93-94마일을 꾸준히 유지하며 슬라이더와 커브는 이미 빅리그급에 도달했다. 그의 직구는 빠르면서도 가라앉는 특징이 있다. 또한 그는 몸쪽공과 스트라이크를 자신 있게 던질 줄 안다.


   그러나 그는 집중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체인지업은 구위는 뛰어나지만 그는 아직 그것을 완전히 구사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언어를 포함하여 미국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다.(베이스볼 아메리카)

 

   인상적인 2000년을 보낸 그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2001년 빠른 속도로 상위 레벨을 거쳐 갈 것”으로 예상했으며 “전년도와 비슷한 수준의 성적을 올려 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대만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땅에 발을 디딘 후 성공가도를 질주했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2000 시즌 경미한 수준이긴 했지만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차오는 2001년 시즌 하이 싱글A 캐롤라이나리그 세일럼 애벌랜치에서 뛰기 시작했는데 시즌 초 부터 팔과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다 결국 팔꿈치 인대 파열로 수술대에 올라야 했던 것. 전문가들은 오프시즌중의 피칭 프로그램 부재가 팔꿈치 부상을 가져왔을 것이란 분석을 했다. 아무튼 그의 우울한 시즌은 4, 방어율 4.67의 성적표를 남긴 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지난해 5월말 팔꿈치 인대재건수술을 받은 차오가 계획보다 빠른 재활속도를 보이고 있어 빠르면 5월 말 이후 피칭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이스 맷 모리스를 예로 들며 최근 같은 종류의 수술을 받았던 투수들의 성공적인 복귀사례에 대한 언급과 함께 차오의 성공적인 컴백을 예상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차오를 로키스 유망주 랭킹 1위로 꼽으며 그의 부활을 의심치 않았다.


   "90마일 중반대의 빠른 볼과 어떠한 볼 카운트에서도 던질 수 있는 탁월한 슬라이더를 갖고 있으며 뛰어난 피칭 감각과 스트라익을 던질 수 있는 능력과 학습능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복귀 준비가 끝난 후 세일럼으로 돌아가게 되고 건강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빠른 속도로 쿠어스 필드를 향해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 현재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차오에 대한 평가다.


   쿠오와는 달리 이미 확실한 2가지 구질을 갖고 있는 차오의 경우 올시즌 후반 세일럼을 거쳐 내년시즌 더블A에서 그리고 빠르면 2004년 시즌중 쿠어스 필드 마운드를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이번 시험을 잘 극복해낸다면 궁극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쿠어스 필드라는 또 다른 도전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신년 좌우명은?
轉禍爲福(전화위복)이 아닐까 한다

 

2009시즌에 쓰는 후기(by 밝은터)

2003시즌에 차오는 더블A에서 시작했다. 더블A 털사에서 그는 11승4패, 평균 자책점 2.46을 기록했다. 좋은 성적이었다. 그는 2003년 7월25일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다. 상대팀은 밀워키 브루어스였다.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2004시즌에 그는 메이저리그 10경기에 등판했지만 부상 때문에 성적은 좋지 않았다. 2005시즌에도 그는 10경기에 등판,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6시즌에도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자유계약 선수로 풀렸고 다저스가 그를 영입했다. 부상은 끝이 없었다. 그는 2007시즌에 다저스에서 21경기에 뛰었지만 역시 부상이 문제였고 2008시즌에는 캔자스시티가 그를 영입했지만 그곳에서도 이렇다할 결과를 내지 못하고 2008년 6월3일 방출됐다. 이후 그는 브라더 엘레펀츠라는 대만프로야구 구단에 지명돼 2009년 3월23일 계약을 맺었고 2009년 10월 경기 조작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4 93
마일 장착한 17세 소년 로칭룽

 

   차오를 발굴했던 콜로라도 로키스가 대만시장 공략에 나서 거둔 또 하나의 `수확물`이 있는데 그의 이름이 로칭룽이다. 라키스는 거금 140만불을 베팅해 LA 다저스, 시애틀 매리너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보스튼 레드삭스등 `로칭룽 쟁탈전`에 뛰어든 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2의 차오` 를 콜로라도로 모셔오는데 성공했다.


   로칭룽이 다저스나 양키스와 같은 명문구단들을 마다하고 투수들에게 극단적으로 불리한 구장을 홈으로 하는 로키스로 진로를 결정한데는 고액의 계약금 외에도 로키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뛰고 있던 차오가 그의 고교(코이오 유안 고교) 선배였던 점도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세의 로는 지난 9월 아시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로키스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는 호주와의 준결승전에서 5이닝 2피안타 8탈삼진으로 호투했다.


   193, 84㎏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그에 대해 베이스볼 아메리카지는 93마일의 빠른 볼과 슬라이더 및 스플리터를 던지며 어린 나이에 비해 유연한 투구동작을 지니고 있음을 장점으로 들었다.


   로는 앞으로 미국 야구와 문화에 얼마나 빨리 그리고 무난히 적응하느냐는 과제를 안고 있으나 체격조건과 나이를 감안할 때 잠재력면에서 오히려 차오를 능가할 재목감인 그이기에 앞으로 그의 성장과정은 주목받을 만 하다.


   베이스볼 아메리카지는 2002 로키스 유망주 랭킹에서 로칭룽을 8위에 올려 그의 성장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로칭룽은 확대 스프링캠프에 참여한 뒤 루키리그에서 시즌을 보낼 예정이다. 꾸준히 성장한다면 그의 나이 21세가 되는 2006년 경엔 로키스의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룰 수 있을 전망이다. 로가 선배인 차오와 함께 장차 로키스 마운드의 `쌍두마차`로 성장해 나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2009시즌에 쓰는 후기(by 밝은터)

2002시즌에 10대 소년 로칭룽은 3승7패에 그쳤지만 평균 자책점은 3.20이었다. 이후 뛰지 못하다가 2005시즌과 2006시즌에 평범한 성적을 냈던 로칭룽은 2007시즌 더블A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 8승8패, 평균 자책점 5.61을 기록했다. 당시 나이 21세였다. 그는 2008시즌에도 역시 8승8패, 평균 자책점 5.25를 기록했지만 2009시즌을 한 레벨 아래인 높은 싱글A에서 시작해 더블A로 승격하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여전히 프로젝트형 선수다.  

 



#5 `
대만 호랑이` 왕치엔밍

 

   관심을 가졌던 대만의 최고 유망주 쿠오와 차오가 각각 다저스와 로키스 선수가 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던 양키스는 다급해진 마음에 대만 유망주 넘버3였던 우완 왕치엔밍을 붙잡기 위해 210만불 이라는 거액을 투자해야만 했다.


   2000 66일 영키스와 계약을 맺고 미국 프로야구 무대에 데뷔했던 왕은 그 즉시 미국으로 건너가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단기리그인 뉴욕-펜리그(하위 레벨 싱글A)의 스태튼 아일런드 양키스에서 선발로 뛰기 시작했던 왕은 데뷔 첫 해 부터 빠른 적응력을 보이며 데뷔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냈다.


   `타이거`란 별명을 가진 우완 왕치엔밍은 14경기에서 44, 방어율 2.48, 87이닝에 피안타 77, 볼넷 21, 탈삼진 75개의 우수한 성적을 남겼고 한 경기에서 11개의 삼진을 잡기도 했다. 그와 관련하여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당시 같은 리그에서 뛰고 있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기대주 송승준(로웰 스피너스 소속)과 맞대결을 펼쳤던 것.


   송과 왕, 두 선수의 선발 맞대결은 양 구단의 유망주들의 대결답게 막상 막하의 피칭이 펼쳐졌으며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송승준은 양키스의 강타선을 맞아 6이닝동안 삼진을 9개나 잡아내고 3안타 2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러나 팀 타선 불발로 승리투수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2-1로 팀이 뒤지던 상황에서 마운드를 구원투수에게 넘겨줬던 것


   왕치엔밍도 6이닝동안 삼진 5개를 잡고 5안타, 1실점, 볼넷 3개를 기록하는 호투를 했으나 구원투수가 9회말에 2점을 허용해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 송승준은 경기 후 ICCsports.com 박병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들간의 대결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 경기에 대해 "팀 간의 라이벌 의식, 아시안의 대결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긴장감이 돌았고 또 양키스팀과의 대결에서는 꼭 이기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왕의 시즌 성적은 13경기에 선발로 나와 52, 방어율 2.60 73이닝 동안 볼넷 20개와 탈삼진 93(리그 1)를 기록했던 송의 그것과 비교할때 엇비슷한 수준이었다왕은 시즌 후 베이스볼 아메리카지가 선정한 리그 탑20 랭킹에서 당당 16(송승준 11)에 그리고 양키스 유망주 순위에서는 13위에 올랐다.


   베이스볼 아메리카지는 왕에 대해 "그는 수준급 패스트볼에 보통 이상의 스플리터와 슬라이더를 던진다. 올 시즌 한 경기에서는 구속 92마일 이상의 패스트볼을 24-25번이나 던졌던적도 있다. 그의 볼 구사력은 특출 나다(outstanding)."라고 한 조 아놀드 양키스 마이너리그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왕은 이미 세가지의 수준급 구질을 보여주었고 보너스로 그 세가지 모두를 낮게 제구되는 스트라익으로 던질 수 있는 능력까지 갖췄다."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부상을 피해갈 순 없었다.


   왕 역시 시즌중 당한 부상으로 시즌 후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고 2001 시즌을 쿠오, 차오와 함께 재활하는데 보내야 했다. 왕은 올 시즌 중반 이후는 되어야 마운드에 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왕은 볼 빠르기에 있어서는 쿠오나 차오보다 느리지만 최고 94마일에 이르는 패스트볼에다 커브, 슬라이더 및 스플리터의 제구력이 뛰어나며 침착한 마운드 운용능력을 갖고 있어 건강을 되찾는 다면 장차 명문구단 양키스 투수진의 한축을 담당할 수 있는 선수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09시즌에 쓰는 후기(by 밝은터)

왕치엔밍은 메이저리그 구단의 대만 선수 영입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왕치엔밍은 2009시즌까지 메이저리그에서 55승26패, 평균 자책점 4.16을 기록했다. 한때 양키스의 에이스로 활동하기도 한 그다. 그는 플레이오프 경기에도 4차례나 선발 등판해 1승3패를 기록했다. 왕은 그러나 다른 대만 출신 선수처럼 2009시즌에 부상으로 제대로 던지지 못했고 결국 2009년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로 풀렸다. 2006년과 2007년 시즌이 전성기였는데 각각 19승을 챙겼다.

 

#6 레드삭스의 기대주 후앙준춘

 

   2000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고 대만투수로는 4번째로 미국 프로야그 선수가 된 후앙준춘은 대만 출신의 다른 투수들이 그랬듯 데뷔 첫해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다. 지난 시즌 루키레벨인 걸프코스트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10경기에 등판 2, 3세이브, 방어율 3.65를 기록했던 후앙은 7월말 뉴욕-펜리그로 올라가서 선발로 뛰면서 자신의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0경기에서 52, 방어율 2.25, 48이닝, 41피안타, 15볼넷, 55탈삼진이 그의 기록. 특히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6이닝 동안 3피안타 1볼넷 탈삼진 12개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시즌을 마무리 했다. 21세의 이 우완 투수도 앞으로 쿠오, 차오, 왕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 줄 것으로 기대된다.

2009시즌에 쓰는 후기(by 밝은터)

후앙준춘은 2003시즌을 끝으로 미국 프로야구에서 뛰지 못했다. 


 

이후 대만 출신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

 

니 푸테라는 대만프로야구 출신 선수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그는 첫 미국 시즌인 2009년 6월29일 메이저리그로 승격돼 구원 등판했다. 그는 대만 출신으로는 여섯 번째 메이저리거로 기록됐다. 타이거스에서 그는 36경기에 등판, 평균 자책점 2.61을 기록했다. 대성공작이었다. 2009시즌까지 대만 출신 메이저리거는 총 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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