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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스타 열전] 알폰소 소리아노

by 밝은터_NJT 2010.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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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역사상 40-40클럽에 들어간 선수는 4명에 불과하다. 이중 3명은 약물의 도움을 받은 선수들이고 1명은 아직까지 약물 스캔들이 없는 선수다. 약물 스캔들이 없는 선수는 바로 알폰소 소리아노. 그는 2006 46홈런, 41도루를 기록해 역사상 4번째로 40-40클럽에 가입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소리아노는 어떤 선수인지 알아보았다.


글: 밝은터(ICCsports.com의 블로거) 사진: PicApp

Cubs Soriano Grounds Out Against the Rockies in Denver


'50-50 클럽' 문을 열게 선수.

 지난 2002 뉴욕 양키스의 선수였던 알폰소 소리아노는 동료로부터 극찬을 들었다. 양키스 동료였던 제이슨 지암비는 "소리아노는 50홈런-50도루가 가능한 선수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지암비는 당시 "소리아노는 빠른 , 선구안, 파워 등을 두루 갖췄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50홈런-50도루 클럽 가입이 가능한 선수"라고 추켜세웠다. 

 사람들은 그저 동료에 대한 입에 발린 (lip service)라고 생각했다. 소리아노는 이후 40홈런을 넘어선 시즌이 번도 없었다. 40-40 클럽 가입도 선수에게 50-50 클럽은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소리아노가 40-40 기록하기 전까지  40-40 클럽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호세 칸세코(42-40, 1988), 배리 본즈(42-40, 1996), 알렉스 로드리게스(46-42, 1998) 가입자들. 40-40 클럽 가입이 어려운 이유는 힘과 스피드가 모두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리그에서 저평가 부문 1

  소리아노는 모든 면에서 최고의 타자가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시절 스카우트는 "소리아노의 몸은 마치 뱀과 같다" 신체적 우수성을 설명한 있는데, 그의 힘과 스피드는 이미 검증됐다. 2006 전까지 비록 40홈런을 넘어선 해는 없었지만 그는 꾸준히 40홈런에 근접한 기록을 냈다. 2003년에 홈런 38, 2005년에 36개를 때려낸 그는 2002년에 도루 41, 2003년에 35개를 기록했다.

 소리아노는 그러나 호타준족의 선수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양키스에서 5 동안 후에 2004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된 그는 2006년이 시작되기 , 워싱턴 내셔널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시카고 컵스에서 활동했다.

Cubs-Phillies

좌익수로 전향한 이후

 지난 2006 320 내셔널스의 프랭크 로빈슨 감독은 소리아노를 좌익수로 기용했다. 소리아노는 전형적인 2루수였기 때문에 감독의 결정을 거부했다. 문제가 발생했다. 구단 측에서 "감독의 말을 듣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할 있다" 통보했던 . 계약이 파기되면 자유계약 선수로서 자격을 얻지 못하는 소리아노는 어쩔 없이 좌익수로 뛰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좋았다. 그는 외야수 어시스트 부문에서 상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후에는 2루수, 좌익수, 중견수 자리를 오가며 유틸리티맨이 됐다. 2009시즌에 그는 좌익수, 2루수, 3루수로 기용된 있다.

Mets v Yankees

내셔널리그 MVP 후보

 소리아노가 40-40 기록했던  내셔널스의 까다로운 감독 로빈슨은 워싱턴 D.C.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0홈런-40도루에 타점 100 이상, 2루타 40, 외야수 어시스트 20개면 MVP 수상은 물론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성적으로 여겨져야 한다" 말했다. 그해 소리아노는 이상의 기록을 냈다.

당해  시즌 초반 소리아노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힘을 얻을 있는 말이었다. 로빈슨이 소리아노를 좋아하게 이유 하나는 그가 개인 기록이 아닌 팀을 위한 배팅을 하고 도루를 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 브락, 리키 헨더슨과 같은 선수는 도루 기록을 위해 도루를 했지만 소리아노는 필요한 상황에서만 도루를 한다" 칭찬했다. 로빈슨은 "우리 성적이 좋지 않아 소리아노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를 MVP 적극 추천했다.  그해 소리아노는 MVP 투표에서 6위에 머물렀다.



일본에서 프로야구 시작

 소리아노는 독특한 경력이 있다. 그는 프로야구를 일본에서 시작했다. 히로시마 카프에서 운영하는 도미니카 공화국 야구 아카데미에 참석해 스카우트의 눈에 띄었던 소리아노는 1996년과 1997년에 등번호 74번을 달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잠깐 뛰었다. 10 소년이었던 소리아노는 1997 18 달러를 요구하는 연봉 중재 신청을 했다가 4 달러를 받게 미움을 샀고 결국 자유계약 선수가 됐다.

1998 자유계약 선수로서 양키스와 계약을 맺은 소리아노는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프로야구를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는 1999년을 루키리그에서 시작해 더블A, 트리플A 거쳐 시즌 막판에 메이저리그로 승격됐다. 고속 승격이었다. 2000년을 트리플A에서 보내며 실력을 다듬은 그는 2001년부터 본격적인 빅리거가 됐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양키스의 유망주로서 인정을 받은 그는 그러나 플레이오프의 중요한 순간마다 부진해 2003 시즌을 끝내고 결국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됐다. 당시 맞트레이드 선수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댈러스로, 댈러스에서 워싱턴으로 , 워싱턴에서 시카고로 보금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성숙한 메이저리거가 됐다. 포지션 이동으로 잠시 문제가 됐지만 그는 조용히 몫을 다하는 메이저리거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팬들도 조용히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컵스에서

컵스에서 소리아노는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다가 2009년에 부진했다. 2009년에 그는 241리의 타율에 홈런 20, 55타점, 도루 9개로 부진했다. 33세의 노장이 탓일까. 그는 2009 95일엔 무릎 수술을 받았다.


어린이 야구를 위해 260 달러 기부

소리아노의 경력 중에 도미니카공화국 어린이 야구를 위핸 260 달러를 기부한 일은 화제가 됐다. 어린이 야구 선수들이 프로야구 선수가 있도록 돕기 위해 거액을 2004 기부했던 것이다.  소리아노의 당시 연봉이 540 달러였다. 이전 시즌까지 그는 연봉 1백만 달러 이하의 선수였다.


 알폰소 소리아노 프로필

이름: Alfonso Pacheco Soriano

생년월일: 1976 17

출생지: 도미니카 공화국, 페드로 마코리스

/몸무게: 6피트1인치, 180파운드

/: 우투우타

포지션: 좌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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