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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스타 열전] 개리 셰필드

by 밝은터_NJT 200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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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셰필드는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항상 뉴스 거리를 제공하는 선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후 LA 타임스 기자들에게 여러차례 특종을 만들어준 바 있다. 셰필드는 어떤 인물인가? 그의 라이프를 소개하기로 한다.


글: 정재호 기자(2002년 당시 ICCsports.com 기자/현 유코피아닷컴 기자)
글/사진: 밝은터(2002년 이후 소식 추가), PicApp

 

`야구 천재` 개리 셰필드의 유년시절

 

1968 11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시에서 태어난 개리 셰필드는 고등학교 시절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마치 야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고교 졸업 마지막 해, 드래프트에 참가한 고교 졸업생 중 `최고의 선수`로 꼽히며 5할의 타율과 4타석당 꼭 한 번씩 터지는 홈런포, 62타석 동안 단 한 번의 삼진아웃도 당하지 않는 놀라운 선구안 등으로 무장한 셰필드는 유래 없는 강타자 재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셰필드는 63, 평균 자책점 1.31를 기록하며 투수로서도 각광을 받은 타고난 `야구천재` 였음이 분명했다. 한국이 서울 올림픽 열기로 뜨거웠던 88, 19 10개월의 청소년 셰필드에게 첫 기회가 찾아왔다. 그 해의 시작을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더블A 앨 파소팀에서 했던 셰필드는 7월 트리플A를 거치더니 급기야 9월 확장 로스터에 들어가 꿈에도 그리던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루는 초고속 성장을 했던 것이다.

   
88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마이너리거`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고, 그 해 3개 레벨(더블A, 트리플A, 메이저리그)을 두루 섭렵하며 기록한 합계 성적은 타율 314, 32홈런, 131타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놀라움 그 자체였다. 덧붙여 88 99일 시애틀 매리너스 전에서 당시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던 마크 랭스턴으로부터 뽑아낸 홈런은 그의 빅리그 첫 홈런으로 기록됨과 동시에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첫 번째 시련과 극복

 

보장된 앞날만이 있을 것만 같던 셰필드의 야구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89 시즌 개막전 주전 유격수로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 다리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을 들락거렸고 시즌 내내 트리플A와 빅리그를 오가며 뚜렷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91 시즌 까지 밀워키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각종 부상에 시달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다 결국 시즌 후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트레이드 되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야구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92 시즌 파드레스 유니폼을 입은 셰필드는 유격수보다 수비부담이 적은 3루수로 컨버전, 확실히 자리잡으며 타율 33, 33홈런, 100타점 등의 성적을 기록, 잊혀져가던 그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렸다.

   
시즌 후 MVP 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그 해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 `올해의 재기상`, 강타자들에게만 허락되는 `슬버 슬러거 팀 멤버 선정` 등 상이란 상은 거의 다 휩쓸었다.

   
고타율은 그를 내셔널리그 타격왕에 오르게 했는데 당시 만 23세이던 셰필드는 지난 1962년 로스엔젤레스 다저스의 타미 데이비스 이후 가장 어린 나이에 타격왕에 올랐다. 바야흐로 셰필드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World Series
 모이시스 알루(왼쪽)와 셰필드

셰필드의 전성기

 

1993년 중반 고향팀 플로리다 말린스로 돌아간 셰필드는 외야수로 변신, 97년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 주역이 될 때까지 말린스의 간판타자로 맹활약하며 스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혀 나갔다. 특히 `96시즌엔 타율 314, 42홈런, 120타점, 142개의 볼넷을 기록, 완전한 슬러거로 자리 매김했다.

   
98년은 셰필드에게 또 한 번의 변화를 준 해였다. 바로 마이크 피아자가 포함된 LA 다저스와의 대형 트레이드 때 주요 선수로 다저스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다.

   
다저스에서의 4년간(98년 전반기 플로리다 기록 포함) 성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4년 평균 타율 3할 이상, 30홈런 이상, 100타점 이상, 391개의 볼넷, 출루율 4할대, 장타율 5할대 등 가장 완벽한 강타자로 군림했다. 모든 것은 기록이 말해준다.

   
그는 2009시즌까지 22년 빅리그 통산 타율(29푼2)과 통산 홈런(509), 통산 볼넷:삼진 비율(1475:1171)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선구안, 장타력을 동시에 겸비한 중심타선 슬러거로 손에 꼽히는 타자였다.

    

셰필드의 무시할 수 없는 재능

 

셰필드는 뛰어난 타자들 일색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번개같은 방망이 스피드와 최상급 선구안으로 무장, 투수들을 기죽게 했다.

   
파워와 인내심의 컴비네이션은 투수들로 하여금 가장 상대하기 싫은 타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투수들은 그를 상대로 보다 높은 집중력에서 오는 잘 다듬어진 로케이션을 선보이지 않는 한 뚜렷한 약점을 찾을 수 없는 그의 빠른 뱃 스피드에 장타를 허용한다. 이는 투수들이 그와의 대결을 꺼리는 이유이다.

   
셰필드는 또한 에이스 투수 킬러로서의 명성도 높은데 이 같은 사실은 그의 강인한 승부근성과도 관련돼 있다. 야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재능적 측면은 모두 갖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Mets Sheffield Waits For Pinch Hit Role Against the Rockies in Denver

참지 못하는 성격

 

하지만 셰필드는 야구 실력 외적인 면에서 아직 너무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지 못하는 그의 불같은 성격은 언제나 팀 관계자들을 불편하게 했고 팀 동료들 및 코칭 스탭과의 잡음도 끊임없이 제기 됐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사실은 좋은 의미로 승부근성이 강하다고 표현될 수 있겠으나, 나쁘게 말하면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주범 역할도 심심찮게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지다저스와의 `동거 생활` 동안 그는 수많은 문제를 직접 야기시키며 언론과 팬들에게 좋지 못한 이미지를 심었다. 비록 그의 뛰어난 실력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희석돼 왔지만 그에게 따라 다니는 이기적인 선수라는 평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연봉에 대한 불만, 공식적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팀 동료들에 대한 비난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구단 회장에게까지 폭언을 서슴치 않는 등 그의 성격은 분명 인격적으로 고쳐져야 할 부분이 많다. 오죽했으면 몇몇 언론들은 그를 빗대어 `불만맨`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하겠는가.

 

`불만맨`을 바꿔놓은 아내

 

셰필드는 가스펠 가수 들리안 리차즈과 재혼한 이후 과거보다 많이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3명의 자녀와 함께 사회 자선사업에도 열심이었다. RBI(Reviving Baseball in Inner cities)라는 자선 프로그램에 매년 단타 1개에 100달러, 2/3루타 200달러, 홈런 300달러를 적립해 기부하고, 97년 세운 `개리 셰필드 파운데이션`을 중심으로 환경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기도 한다.

   
매년 불우이웃 돕기 자선 야구대회도 개최하는 등 사회적인 선행에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셰필드인 것이다. `문제아` 셰필드가 이런 일을 하는데에는 아내의 역할이 컸다

   
셰필드는 1998년 시즌중 플로리다 말린스로부터 다저스로 트레이드된 후 심각하게 은퇴를 고려했었다가 당시 리차즈를 만났던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셰필드는 "나는 확실히 야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내를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었을때 나는 새로운 활기를 얻었다. 그녀가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성서을 알게 되면서 삶에 대한 많은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더욱 열린 마음과 더 많은 이해심으로 더욱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라며 자신의 변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의 곱지 못한 시선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의 원만하지 못한 성격에서 기인한다

Premiere Of The Woodsman

꾸준한 성적, 그러나 계속된 트레이드

셰필드는 2002년 1월15일 다저스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됐다. 브레이브스에서 두 시즌을 뛰면서 그는 홈런 64개, 216타점을 기록했다. 특히 2003년 시즌에 그는 132타점을 올렸다. 2003년 10월27일 자유계약선수가 된 셰필드는 이후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3년 동안 3,900만 달러의 거액 계약을 맺은 후였다. 2004시즌에 그는 홈런 36개, 121타점, 타율 2할9푼을 기록해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를 흡족케 했다. MVP투표에서 그는 2위에 올랐다.

2005시즌에도 셰필드의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고 그는 홈런 34개, 123타점을 기록했다. 2006시즌도 출발은 좋았으나 4월29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서 셰이 힐렌브랜드와 충돌하면서 팔목 부상을 당했고 9월 말까지 출전하지 못했다. 출전하지 못하는 동안 그는 양키스의 동료 선수와 갈등이 많았고 특히 바비 어브레유를 비꼬는 듯 말하면서 팀 분위기를 흐트러놓았다. 양키스는 2007시즌읖 앞두고 그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했다.

트레이드직후 그는 타이거스와 2년 계약을 맺었는데 좋은 조건이었다. 2,800만 달러를 받게 됐다. 2007시즌에 그는 홈런 25개, 75타점을 기록했고 도루 20개를 보탰다. 그는 아메리칸리그에서 20-20를 기록한 여섯 명 중 한 명이었다. 셰필드는 2009년 3월31일 방출됐다. 타이거스는 그에게 1,400만 달러를 약속한 채 그를 포기했다. 셰필드는 2009년 4월3일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었고 이곳에서 통산 500홈런을 기록했다. 500홈런을 넘어선 25번째 선수가 된 셰필드는 그러나 스테로이드 사용자 명단에 들어 대기록에 빛이 바랬다. 2007년 발표된 미첼 리포트에는 셰필드의 이름이 있었다. 
 

-셰필드 프로필-

 

이름: 개리 셰필드(Gary Antonian Sheffield)

생년월일: 1968 11 18일생

신장/체중: 180cm, 85kg

/: 우투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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