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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스포츠 스타 열전

[스타 열전] 아놀드 파머

by 밝은터_NJT 201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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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가 볼을 갖고 하는 다른 게임하고 크게 다른점을 하나 든다면 플레이어와 관객이 함께 필드를 걸어가는 것이다. 골프에서만 볼 수 있는 그 특성이 아놀드 파머의 응원 부대를 만들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

 플레이할 때의 파머는 누구보다도 매력적이었는데 페어웨이를 걸어갈 때의 그 꾸밈없는 표정은 관중에게 '우리들의 부대장'이란 친근감을 주었다.

 눈을 마주치기만해도 관중들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소년들을 소중히 대했다. 그 상징적인 것으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선더버드 클래식 경기 때 13세의 소년이 그 아버지와 함께 파머의 뒤를 쫓아가며 구경을 했다. 12번 홀에 왔을 때 소년은 앞질러가서 14번 홀에서 파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은 장소에서 파머의 플레이하는 것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 페어웨이 한쪽에 서있는 소년 쪽으로 걸어온 파머가 말을 걸었다.

  "13번 홀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 그사이 어디에 가 있었지?"

  파머는 그 정도로 자상하고 세심했다. 또 어느 시합에선  그린 위에서 마크를 하고 뒤로 걸어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갔는데 그러다가 청각장애인인 12세 소년하고 부딪쳤다. 파머는 순간 그 소년이 장애아라는 것을 알고 상대편 선수가 퍼팅을 끝내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포근히 안고 있었다.

  그 후 소년은 누구에게나 손 짓으로 얘기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아놀드 파머는 내 친구야."

  그 때문에 18번 홀을 홀아웃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가는  파머의 둘레에는 언제나 소년 팬들이 겹으로 둘러싸여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은 소년들의 보물이 되었고, 파머가 경기에 나갔을 때는 그 보물을 흔들며 응원을 보냈다. 물론 응원을 한 것은 소년들만이 아니다.  파머가 퍼팅이 빗나가 명중 시키기 못하기라도 하면 미국 각지에서 팬들이 나름대로 의견이나 어드바이스를 보내왔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나는 당신의 열광적인 팬인데 봅 호프 클래식의 마지막 라운드 17번 그린에서 당신이 퍼팅했을 때  퍼터 헤드 끝이 살짝 움직인 것을 볼 수 있었다. 1965년 선더버드 경기 때도 그랬었다. 그래서 버디 퍼팅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또 어떤 편지에는, "클리블랜드 경기때 꼭 한마디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짜리 학생이 수학 공부를 하다가 아인슈타인에게 수학의 공식을 일러주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어서 일러주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가 없다. 실은 퍼팅할 때 당신의 퍼터가 약간 흔들리는 듯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일러주고 싶은 말은 이것 뿐으로 무례한 이 말을 아무쪼록 이해하고 참고로 삼아주기 간절히 바란다."라고 씌어 있었다.

  그 중에는 퍼팅의 명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자기 집 거실에서 하는 연습방법을 적어서 보내기도 했다.

 "티팩을 거꾸로 세워놓고, 그것을 표적삼아 그 표적에서부터 흰 실을 깔아 티팩 라인으로하여 몇 m쯤 떨어진 위치에서 볼을 굴려보내 그 티팩을 쓰러뜨리는 연습을 하루 일과처럼 지키면서부터 퍼팅이 좋아졌다. 컨디션이 좋을때는 18홀을 72, 평균으로도 76-78이다. 그리고 끝으로 당신이 앞으로도 계속 위대한 골퍼로 활약할 것을 바라고 있으므로 도움이 될까하여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아무쪼록 더욱 힘내시길 빌어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60년대의 파머에게는 그와같은 팬레터가 끊임없이 보내져 왔다. 그 중에는 헐뜯는 내용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마음속에서 우러난 친애롭고 정감어린 것들 뿐이었다.

  파머와 함께 페어웨이를 걸었던 감격을 전하고자 하는 한 마음 뿐인 것이다. 그와 같은 파머도 70년대에 접어들고는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았다.



 1973년의 봅 호프 클래식이 그의 투어에서 마지막 우승이 되었고, 언론에서는 "그의 은퇴시기가 찾아왔다"고 까지 보도했다.

  "신데렐라의 꿈이 끝나가고, 그것을 알리는 종소리의 밤이 다가왔다."고 글을 쓴 기자도 있었다. 그러나 파머나 팬들이나 그런것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시니어 투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1929년 태생의 파머가 시니어의 시합에 나간 것은 80년의 '전미프로 시니어'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 경기에서 거뜬히 우승했다. 레귤러 투어에서 '시들어진 영웅'만을 볼 수밖에 없었던 팬들이 마침내 활기를 되찾았다. 80년대 초, 1, 2년 사이에 몇 시합에 불과했던 시니어 투어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84년에는 24개 대회, 상금 총액이 5백만 달러, 85년에는 27개 대회로 상금도 6백만 달러가 되었다.

   그리고 70년대까지는 55세 이상이 참가 자격이었는데 USGA 주최의 '전미시니어 오픈'도 80년대에 들어서서는 '50세 이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파머에게 출전 자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 열망에 부응하여 81년의 '전미시니어 오픈'에서 우승, 그후 80년에 한 차례 우승, 84년에는 다시 '전미프로 시니어'에서 우승을 하였고, 그 외에도 두 번 우승이 있었다. 시니어 투어의 특색중 하나는 '프로 . 아마'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프로에 4명의 아마추어가 함께 라운드를 한다. 결승 라운드는 프로만 하지만 전반전에서는 '프로 . 아마'의 성적도 토너먼트 스코어로 채용된다. 아마추어는 시합에서 프로의 묘기를 실제로 구경하며 플레이를 함께한다.

  그것 또한 다른 볼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시합 방법이다. 파머가 그 메인 호스트가 된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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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골프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골프는 바로 내 인생 그것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게임에 미친 공헌이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게임이 내게 안겨준 힘과 꿈이었다. 내가 아무리 힘을 다해도 그 게임에서 받은 힘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것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은 나를 칭찬해 주었지만 그것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골프를 칭찬한 것이다."

  파머는 언제나 골프를 감사하면서  플레이를 하였다.

   파머는 PGA 투어에서 총 62차례 챔피언에 올랐다. 시니어 투어에서는 10차례 챔피언이 됐다. 메이저 대회에서는 매스터스에서만 4회 우승, US 오픈 1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총 7차례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골프 헤럴드=ICCsports.com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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