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은 알면 알수록 이 시대 '다양성'에 부합하는 지도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의 다양한 배경은 또한 그의 단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인간을 넓게 볼 수 있는 버락 오바마에 대한 연재를 기획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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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대학교에서 2년은 정치인 버락 오바마에게 가장 중요한 2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했다. 오바마는 데이비드 멘델과의 인터뷰에서 “2년 동안 나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외로웠다. 그때 생각하는 남자가 자주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2년 동안 소위 ‘오바마 사상’의 기초를 세운 그는 1983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졸업 후에도 맨해튼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면서 오바마는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을 위해 컨설트를 해주고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업하게 됐다.
그는 이 회사에서 1년 동안 리서치, 기사쓰기, 기사 편집 등의 일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양복을 입고 일하는 게 좋긴 했지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꿈과는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1년 만에 그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간신히 월세를 낼 수 있을 정도만 월급을 받고 할렘과 브룩클린에서 일을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제리 켈만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바마에게는 중요한 연락이었다. 켈만은 시카고 저소득층 지역에서 그들을 도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백인 유대인인 켈만은 시카고에 개발 지역 프로젝트(DCP)라는 단체를 시작했다. 오바마가 그곳에서 해야할 일은 주민들과 힘을 합해 더 좋은 지역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운동가의 역할이었다.
켈만이 맨해튼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한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눴다. 켈만은 오바마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켈만은 대학 교육을 받고 비교적 낮은 임금에도 일할 흑인을 찾고 있었는데 오바마는 적격자였다. 켈만은 오바마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더욱 그를 고용하고 싶었다.
오바마는 일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시카고라는 생소한 도시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게 좋게 느껴졌다. 결과적이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오바마가 정치인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85년 6월 시카고에 도착한 오바마는 23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시카고에서 일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배웠다.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South Side)는 미국에서 흑인이 집중된 가장 큰 지역이었다. 오바마는 그곳 주민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었다. 오바마는 한 번 맡겨진 일에 빠지면 깔끔하게 일을 해냈다. 물론 자주 실패를 경험했다.
켈만은 끊임없이 오바마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그는 오바마에 대해 “남을 돕겠다는 사명에 불탄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켈만은 이어 “오바마는 야망도 있었지만 항상 봉사정신이 그것과 섞여있었다”고 덧붙였다. 켈만은 오바마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처럼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우스 사이드에서 일하면서 오바마는 이곳 주민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까지 오바마는 종교적인 믿음은 없었다. 오바마는 이곳 주민들이 교회와 목사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바마는 따라서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교회와 목사가 존경받는지 알고 싶었다. 제러마이아 A. 라이트 목사는 그가 출석한 교회의 목사였다. 교회명은 트리니티 연합 교회였다. 라이트 목사는 오바마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라이트 목사는 이후 오바마의 멘토이자 선생이 됐다. 라이트는 오바마에게 흑인의 인생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줬다. 라이트 목사는 또한 오바마가 종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자에서 기독교 실천가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오바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미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성경을 항상 갖고 다녔다. 그는 성경이 이웃을 돕고 이타적인 내용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자신의 신념과 맞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커뮤니티 개발자로 일하면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주민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지도자들은 협조를 하지 않았다. 라이트 목사는 “이는 현실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결국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커뮤니티 개발을 못하게 된 오바마는 자신이 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자신이 목회자처럼 뛰어다녔던 것이다. 그는 하루에 20-30명씩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었다.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정부도 빈곤층 흑인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오바마는 알게 됐다.
그는 또한 빈곤층의 주택문제, 환경문제, 건강문제 등을 보게 되었고 이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가 시카고에서 커뮤니티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은 이상은 현실과 함께 가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1987년 최초의 흑인 시카고 시장이 된 해롤드 워싱턴이 이곳 흑인들의 희망적인 존재임을 알게 됐다.
한편, 케냐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가 사망한 후에도 버락 오바마 주니어는 배다른 동생인 아우마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아우마는 독일 유학생이었다. 아우마는 버락을 만나고자 시카고를 방문했다. 아우마는 버락과의 만남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는 케냐에서 꽤 명망높은 경제학자였는데 당시 케냐의 대통령이었던 조모 케냐타에 직언을 했다가 쫓겨났다고 했다. 이후 그에게 직장을 주지 말라는 대통령의 명령으로 인해 아버지 오바마는 무숙자가 됐다. 이후 다시 직장을 얻게 됐지만 아버지 오바마는 이미 알콜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음주운전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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