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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주 상원의원이 된 버락 오바마의 당시 나이는 35세였다. 젊은 나이에 정치인이 된 오바마는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800건 이상의 어린이 및 가난한 주민들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상원의원들이 정직하게 정치활동을 하도록 하는 법안도 상정해 통과하도록 했다. 상원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오바마는 2000년 시련을 겪었다.
미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나선 그는 쓴 패배를 맛보았다. 2000년 선거에서 그는 바비 러시를 상대했다. 러시는 흑인으로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 지역에서 많은 지지자가 있던 인물이다. 시카고 유권자들은 오바마를 좋아했지만 “러시가 정치하면서 잘못한 게 없었다”며 동정표를 그에게 던졌다. 이 선거를 치르면서 오바마는 재정적으로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당시 선거에 대해 아내인 미셸 오바마는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미셸은 오바마가 러시에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내의 말이 맞았다. 그는 또한 이 선거에서 정치 9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인 것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하원의원 선거에서 패했던 오바마는 다시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2002년 그는 미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미셸은 반대했다. 미셸은 “우린 돈도 없고 승산 없는 선거에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버락 오바마는 그러나 “이번에 지면 정계를 떠나겠다”고 말하며 끝내 아내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의 친구이자 정치 매니저였던 댄 쇼먼은 연방 상원의원 선거는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크게 실망했다. 쇼먼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구원투수가 있었다. 바로 시카고 트리뷴지 기자 출신이자 선거 매니저로서 베테랑인 데이비드 액설로드를 만나게 됐던 것.
액설로드는 선거에 나서는 후보의 장점을 잘 간파해 이를 홍보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다. 또한 언론계의 인맥이 넓은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액설로드가 오바마 캠프에 들어간 것은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액설로드는 즉흥 연설을 잘하는 오바마가 좀 더 안정되게 연설할 수 있도록 도왔다. 원고 없이 연설하는 오바마에게 때로는 원고를 준비하도록 충고했다.
오바마가 2002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을 때 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는데 이는 액설로드와 오바마의 작품이었다. 오바마는 당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상황에서 정면으로 조지 W. 부시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으로서 자리를 잡게 됐던 것이다. 시카고 페더럴 플라자에 모였던 2,000명의 군중은 그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다.
그동안 무명이었던 오바마는 그 연설로 일약 정치계의 스타덤에 올랐다. 미 연방 상원의원 민주당 경선을 하면서 일부 정적들은 “오바마는 흑인이 아니다. 백인 진보주의자들을 위한 정치인이다”라는 비난이 일었지만 시카고 시민들은 그가 흑인 커뮤니티에서 많은 일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선거 유세를 할 때도 주로 흑인 교회에서 연설을 하곤했다. 거의 매주 일요일 그는 흑인 교회를 방문해 자신의 정견을 소개했다.
2004년 7월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그는 공화당의 잭 라이언과 최종 대결을 벌이게 됐다. 라이언은 보수파 계열에서는 떠오르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라이언은 ‘공화당의 오바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다.
그러나 라이언 캠프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오바마의 실수를 잡아내기 위해 그를 24시간 쫓아다니는 비디오 자키를 고용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촬영한 일이 발각되면서 그에 대한 인기는 금세 시들었다.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이 파파라치를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오바마는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사람이 바로 내 스토커”라고 크게 외쳐 시카고는 발칵 뒤집혔다. 다음날 시카고 언론은 스토커에 대한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공화당 후보인 라이언은 공개 사과했지만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선거에서 빠졌다.
오바마는 민주당 경선 때도 상대 후보의 약점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파파라치를 그대로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민주당 경선 때 자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상대에게 스캔들이 생기자 오바마는 거듭 “노코멘트”로 일관한 바 있다.
오바마는 상대를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강조하며 유세를 벌였다. 그는 모두가 힘을 합해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을 펼쳤다. 공화당 후보였던 라이언이 빠지자 공화당은 거의 패닉 상태가 됐다. 어쭐 수 없이 내민 카드는 당시 메릴랜드주에 거주했던 앨런 키즈였다. 키즈는 흑인 보수파로 말이 거친 사람이었다. 오바마에 대한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그는 “예수가 선거에 참여한다면 오바마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극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결과는 오바마의 완승이었다. 오바마는 7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키즈는 29%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던 오바마는 연방 상원의원이 됐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관심 받는 정치인이 됐다. 그는 2004년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 연설자로 참여했는데 여기서 대선 후보였던 존 케리보다 더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됐다.
민주당 내에서는 “오바마가 차기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총선거에서 오바마는 미 상원의원으로 당선됐지만 케리는 조지 W. 부시에 패했다. 오바마 당선 파티는 그래서 냉랭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이번 선거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미국의 변화를 위해 주요 인물이 될 것이라며 주목을 받았고 정치인으로서는 화합을 중요시한다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 선거이기도 했다. 재정난에서도 벗어났고 미래 대통령 선거를 위한 참모를 얻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이렇게 빨리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것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는 2008년 대선을 위한 전주곡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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