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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버락 오바마

버락 오바마(10)-정치에 입문하다

by 밝은터_NJT 2009.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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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아시아에서 4년 이상 거주했던 대통령. 아프리카를 아는 대통령. 쌀밥에 고추맛을 아는 대통령. 흑백 혼혈 대통령. 가난의 불편함을 아는 대통령. 중산층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던 대통령. 다양한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대통령. 부모 이혼의 아픔을 아는 대통령. 배다른 동생을 잘 돌봐준 대통령. 아버지가 두 명 있는 대통령. 농구를 좋아했던 대통령.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아는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알면 알수록 이 시대 '다양성'에 부합하는 지도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의 다양한 배경은 또한 그의 단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인간을 넓게 볼 수 있는 버락 오바마에 대한 연재를 기획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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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의 일리노이주 정치인 시절 이야기를 CNN 방송이 소개했다. 여기에 앨리스 파머, 에밀 존스 주니어, 댄 쇼먼 등 오바마의 정치 인생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나온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일을 시작한 버락 오바마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유권자들의 서명을 받는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일리노이주 투표 프로젝트를 통해 무려 150,000명의 새 유권자가 등록을 하게 됐다. 엄청난 결과였다. 이 무렵 오바마는 ‘내 아버지의 꿈’이라는 자서전을 쓰고 있었다. 프로젝트 진행과 집필로 그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내인 미셸은 이로 인해 외로움을 느꼈다. 오바마는 미셸과 보낼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후일 이를 인정했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제한돼 있는데 유권자 등록프로젝트, 자서전 집필 등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프로젝트를 마친 오바마는 마이너, 반힐&갤런드라는 로펌에 입사했다. 이 로펌은 주로 인권문제와 차별소송만을 다뤘다. 오바마는 재판정에 서는 일보다 주로 리서치를 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일에 시간을 썼다.

오바마가 이 로펌을 선택한 이유는 저드슨 마이너 변호사가 이 회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너는 시카고 첫 흑인 시장이었던 해럴드 워싱턴과 함께 많은 일을 했던 인물이었고 인맥이 넓었다.

오바마도 인맥을 넓혀가면서 정치에 계속 관심을 뒀다. 1995년 오바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했던 것. 주 상원의원이었던 앨리스 파머가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로 하면서 공석이 생겼다. 오바마는 이 자리를 채우고자 했다. 파머는 오바마를 지지하면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마하더라도 보궐선거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파머는 그러나 연방상원의원선거에서 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자 그의 측근과 지지자들은 오바마를 찾아가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지 말 것을 종용했다. 오바마는 파머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약속은 너무 쉽게 깨졌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한 파머는 보궐선거에 나서기로 했다.

오바마는 파머가 급하게 서명을 받은 청원서 중 200개가 무효임을 발견하고 그가 보궐선거에 나설 자격이 없음을 밝혔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파머는 2008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아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 바 있다.

오바마는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쉬운 승리를 거뒀다. 정치인으로 입문하고 첫 승리였다.

그가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기로 결정한 후에 ‘시카고 리더’라는 신문은 오바마의 인종과 정치에 대한 견해를 상세히 소개했다. 그가 많은 사람에게 자세히 알려진 첫 번째 기사였다.

1995년 11월8일자 시카고 리더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오바마는 인권운동 변호사, 교수, 작가, 자선사업가로서 하루 12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 정치인을 추가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게 아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커뮤니티 세우기에 관심이 많았다. 오바마는 미국의 흑인 사회가 정치적으로 절름발이처럼 돼 있는 상태를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오바마는 국민 스스로가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한다.”[1]

그는 하버드대 시절에도 정치에 입문했을 때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건강한 커뮤니티를 세우기 위해 어울려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버드대 시절 그는 다양한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 의견을 경청하는 리더로 유명했다. 인권운동을 할 때도 교수로 일했을 때도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모든 사람이 어우려져 건강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었다.

주 상원의원이 된 직후 오바마는 널리 사랑받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흑인 상원의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나중에 오바마의 측근이 된 기자 출신의 댄 쇼먼도 처음에는 오바마를 싫어했다. 그는 오바마와 깊은 대화를 나눈 후 그와 금세 절친이 됐고 정치 인생을 함께 했다.

오바마는 쇼먼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 쇼먼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이 들면 그가 원하는대로 행동에 옮겼다. 오바마는 흑인이지만 백인 중산층과 잘 어울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백인 중산층이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주 상원의원으로서 첫 2년 동안은 ‘주요 정치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동료를 만들었다. 정치인, 의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골프를 배웠다. 그러던 중 만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에밀 존스 주니어였다. 주 의원이었던 에밀 존스 주니어는 오바마가 상원의원이 된 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존스 주니어는 아버지가 없었던 오바마를 마치 친자식처럼 생각했다.

한편, 1995년 11월7일 오바마의 친모인 스탠리 앤 던햄이 세상을 떠났다. 자궁암을 극복하지 못한 던햄은 아들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1월은 오바마가 선거운동을 벌였던 시기였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오바마는 이를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했다. 모친이 사망한 후 하와이에 도착한 버락 오바마는 동생 마야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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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카고 리더, http://www1.chicagoreader.com/obama/9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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